내가 발 딛은 지금 이곳, 다시 그대에게; 01 소설



이곳으로 온지 반년, 나는 마침내 전장 한가운데 섰다.

"전방!"

코앞서 정예 중장기병대가 땅을 박차 흙먼지를 말아 올리는 와중 내 숨은 멎을 듯 가빠왔다. 전신갑주를 두른 220파운드의 육중한 무게는 시위를 떠난 살이 되어 전력으로 질주하고, 옆서 고함치는 어느 마법사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불꽃이 날았다. 폭발했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깨지는 소리, 비명 소리. 처음 맡아보는 미적지근한 비린내가 풍겨와 코끝을 찌르고,

"전방 중기병대 난입! 충돌!"

공왕 각하! 공왕 각하! 장교들이 쫓아와 미친 사람처럼 나를 불렀다. 내게 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내려줄 말이 없었다. 나는 되려 울고 싶었다. 어쩐지,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돌아간다 싶었지.

여섯 달 전, 수능을 망쳤다. 어이 없는 실수였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굴욕과 절망에 나는 처음으로 소주를 입에 댔다.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고 오발탄처럼 정처 없이 다리를 지나다가, 취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난간을 넘어,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원래라면 죽었어야 할 나는, 기적처럼 이곳에 오게 되었다.

이제 겨우 유아기를 벗어난 어느 얼빠진 드래곤, 붉은 용 일족의 공주라는 녀석이 나를 이 세계로 소환해냈다. 실수 대신 녀석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고, 나는 들떴다. 여섯 달동안 돈을 물 쓰듯 뿌리고 철지난 영웅 행세를 했다. 이곳은 환상의 세계다. 마법과 용이 있다. 전설과 낭만이 남았다. 수능을 망치고 재수나 준비해야 할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이곳은 그야말로 나만의 세계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돌아 마침내 이야기는 해피엔딩의 목전까지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공주를 옹립한 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공왕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토록 행복하게 살았을까.

"각하! 대대 전열이 무너집니다!"
"예비대 투입 허락해주십시오! 공왕 각하!"

제발 마음대로 해. 나 몰라.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두 장교는 존명! 그 한 마디를 복창하여, 말머릴 돌렸다. 재차 유스티티아 대대를 향해 돌격 명령이 떨어졌다. 준엄한 공왕령에 따라 오른편으로부터 천둥같은 말발굽소리가 뛰쳐나왔다. 선홍빛 크림슨의 깃발이 나부끼며 적진으로.

피를 적신 붓이 푸른 하늘을 길게 가로지르고 쇳소리와 비명이 번갈아 귀청을 후려친다. 말갈기에 머리를 처박고, 나는 주문처럼 내가 알고 있는 전부를 되뇌었다. 여기는 현실이 아니야. 여기는 현실이 아니야. 여기는――

"각하! 앞에!"

어느 근위대의 새된 고함과 함께, 일순 내 몸이 장난감처럼 튕겨올랐다.

타고 있던 말이 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한 바퀴를 돌아 내팽개쳐진 몸이 죽을 것처럼 아프다.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비명을 뱉고 뒹구는 와중, 말에 미늘창을 찔러넣었던 어느 보병이 제깍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있었다. 새파란 살기를 띤 그 눈이 내게로 다가들었다.

"이새끼, 너 이 간나새끼――"

서방 사투리 섞인 공용어가 병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창이 뽑히고 그 시퍼런 날이 내게 향했다. 씨발. 욕지거릴 뱉는 내 심장은 공포로 터질 듯 고동쳤다.

허리춤에 매었던 칼자루를 휘어잡기까지 걸리는 몇 초에 머리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허리께로 박히는 창날을 볼썽사납게 굴러 피하고, 나는 퉁겨 일어났다. 뽑아 올린 보검을 바투쥐었다. 집어먹은 겁마저 이윽고 마비되었다. 긴 창을 피하여, 힘껏.

뜨겁게 달아올랐던 적병의 눈이 내 코앞으로 다가온다. 흉갑을 두부처럼 꿰뚫고 그의 가슴으로, 이 나라 공주로부터 선물받은 내 전설급 보검이 깊게 박히었다. 손끝으로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차례로 찾아든다. 퍼득! 뛰어오르는 단말마 발악에 겹치어 피가 얼굴로 튀었다. 시뻘겋게 젖은 내 손은 이윽고 떨며 칼자루를 놓아버렸다.

"허, 어억."

비명조차 되지 않는 이상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비명인지 아니면 그의 비명인지. 말가니 선 내 앞에서 그는 고꾸라졌다. 피범벅이 된 채로 멍하니 선 것은 내쪽이었다. 발끝부터 시작된 떨림이 심장으로 옮는다. 울음이 치밀었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아니다. 여기는 현실이 아니야.

"한가람! 너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이윽고 쿵! 하는 폭음. 내 앞까지 치달았던 십수명 적병이 폭발과 함께 쓸려버렸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나의 아리따운 드래곤, 위시는 내 울음을 알아채고 멈칫 입술을 깨물어 내게 다가왔다. 내 멱살을 잡아챘다.

고함쳤다.

"왜 그러고 있어! 기껏 부어 준 5서클 마력은 어쩌고! 이 얼간이가!"

그 상황에서 마법 생각날 틈이 어디 있다고 너까지 그래.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내 말을 가로채, 코앞까지 닥쳐온 그 애는 깨끔발을 들어 고집스런 눈을 치떴다.

"왜, 이제 와서 무서워? 공주 그 계집애한테 그렇게 큰 소릴 쳐놓고?"
"나는, 나는 이럴 줄 몰랐단,"
"전쟁이 빤히 이렇지, 그러면 어떨 줄 알았는데!"

게임.

말을 뱉어놓고도 나는 덜덜 떨었다. 게임 같을 줄 알았다. 키보드로 지시하고 마우스로 컨트롤하는 그런 게임. 전지적 지휘관의 시점에서 드래그하고 우클릭하면 끝장일 모니터 속의 먼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무심코 그럴 줄로만.

위시는 긴 머리칼을 드리워 표정을 감췄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눈을 치뜬 붉은 눈동자의 소녀는 있는 힘껏, 내 뺨을 때렸다. 고개가 홱 돌았다. 맞은 왼 뺨이 뜨겁다.

"이따가 얘기해."

빨갛게 부어오른 손바닥을 채 내리지도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속삭이는 위시의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이따가, 반 죽여 놓을 테니까, 그 전에 멋대로 죽으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저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되는 소리인 줄 알면서 그 자존심 강한 드래곤은 굳이 말을 고치지 않았다. 춤사위처럼 돌아선 위시의 손에 시뻘건 불꽃이 일었다. 사방천지의 마력이 준동하여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활개 쳐 올린 내 드래곤의 손끝은 기적을 일상처럼 빚어내고, 일순간 수백 목숨이 불살라지며 화력통로가 개척되었다.

쿵! 쿠웅! 연달은 폭발에 이어 유황냄새와 섞이는 고기 타는 역한 냄새. 나는 또 벅차오르려는 겁먹은 울음을 삼켜, 내게 달려오는 장교들에게로 돌아섰다. 그들은 먼지투성이가 된 나를 보고 놀라 입을 벌렸다.

"각하, 이 무슨――"
"괜찮아. 괜찮으니까 작전대로."

리베르타스 대대 투입해. 목소리를 쥐어 짜내는 나는 작계의 타임라인만을 되뇌고 있었다. 리베르타스 대대가 급작스럽게 적의 측면을 들이쳐 진영을 헤집고, 베리타스 중장보병대가 연이어 진격하기로, 그렇게 짜인 작계였다. 이길 것이다. 이겨야 했다.

시체를 밟아가며 전선은 차츰 전진하고 있었다. 숨을 돌리자 비로소 나는 내가 벌인 죽음의 굿판을 멀리까지 직시할 수 있었다. 온 천지가 핏빛이었다. 구역질이 도졌다.

다섯 시간이 지나 전투가 멎었다.

결국 나는 그 한 명 이후로 누구도 죽이지 못했다. 굳이 더 죽이지 않아도 내 지휘로 총합 7200이 죽어나간 뒤였다. 목숨 2300을 밀어 넣고, 적병 4900명을 오롯이 짓밟고. 승리의 환호성에 묻혀 왕도에 입성하면서도 나는 이 미친 악몽이 깨기를 바랐다.

"전하께옵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내궁 앞에서 내게 그렇게 속삭인 어느 시녀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무겁던 갑옷을 벗고, 칼을 풀어 맡기고. 개선장군으로서 월계관을 쓴 나는 비척, 피칠갑 같은 레드카펫을 밟았다. 무겁던 몇 겹 문이 열렸다. 긴 복도가 이어졌다.

이윽고 다다른 내궁 가장 깊은 곳서는 흰 세마포를 두르신 공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나를 본 전하께옵선 설핏 사심 없는 고운 눈길을 내리시고, 한없이, 예쁘게 웃으셨다.

"어서 오세요 공왕."

위시와 함께 내 현실감을 엷게 만드는 또 한 사람.

공주 전하. 루시아 아스그나스 공주 전하.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어느 곳에서나 나올법한 공주님께서는 누가 일부러 그리 빚은 마냥, 가슴 뛰도록 아름다웠다. 긴 금빛 머리칼 드리운 아래 옥안은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이편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는 보석처럼 찬연한데 더하여 이지理智를 끌어안았다. 어여쁠 뿐 아니라 총명한 분이셨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생이나 되었을 어린 나이로 정권을 휘어잡으신 전하께옵선, 왕국의 유일한 합법적 국가수반으로서 군통수권을 틀어쥔 채 위태로운 전쟁을 끌어가고 계셨다.

이 사람에 비하면 나는, 위시를 등에 업고 전하의 분에 넘치는 신임을 받은 나는, 마침내 공왕에 올라 아무것도 모르고 전쟁에 나갔던 나는, 얼마나 철없고 멍청한 사람일까.

"압승을 거뒀다고요. 적의 정예 기사단들을 모두 파훼하고."
"공주 전하의 도우심입니다."
"공왕도 이제 제법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네요. 처음에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더니."

격의 없는 그 희롱에 나는 힘든 것도 잊은 채 웃었다. 고개를 들자 마주친 전하의 푸른 눈은, 소녀다운 장난기로 짐짓 얄밉게 눈웃음을 치고 계셨다.

"나한텐 그럴 필요 없어요. 서로 잘 아니까, 낯간지러운 공치사 안 해도 용서해 줄게요."
"아니오, 전하, 그땐 제가 뭘 몰랐던 걸요."
"그러게요. 아쉬워요. 그때가 훨씬 부려먹기 좋았는데. 이제 그때처럼은 안 되겠지요?"

그때처럼. 나는 대답을 잊은 채 미소 띤 공주, 루시아 전하의 모로 기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적 저 하얀 얼굴에 잔뜩 먼지와 검댕 묻었던 것이 떠올라 무심코 빤히. 마주친 눈으로부터 무엄하다는 꾸중은 내려오질 않았다.

"고마워요, 가람. 아니, 미안해요."

루시아는 마침내 어색한 공왕 칭호를 치우고 내 이름을 불러왔다. 곱고도 기쁜 그 목소리에 지쳤던 내 심장이 뛰었다. 뭐가요? 하고, 얼른 시치미를 떼면서도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전부요. 나 이 자리까지 오르게 도와준 것도. 오늘 싸우고 손에 피를 묻힌 것도."
"전하, 저 앞으로는,"
"난 열세 살에 첫 살인을 했어요."

아예 공왕직을 내 놓으려던 나는 멈칫 말을 삼켰다. 옥좌서 일어선 소녀는 내게 다가섰다.

"내 왕위, 내 목숨, 내 몸을 노리던 자들로부터 내 정당한 법익들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밑도 끝도 없이 계속. 오늘도 한 칠천여 명이 내 명령으로 전장에서 죽어나갔군요."
"전하,"
"가람이 살던 곳은 누군갈 죽이지 않고도 평화롭게 살 수 있던 곳이라 했는데 여기는 그렇지가 못하네요. 결국 가람의 첫 살인은 내가 촉탁했고."

무릎을 꿇어 나와 눈높이를 맞춘 그녀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내 손에 절었던 피비린내를 단숨에 지워 없앨 만치 향기롭다. 멈칫 나는 그 사람에게 울 뻔.

"항상 미안해요, 가람."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무어라 더 말하려던 양 입술을 열었던 루시아는 못내 노래 같은 침묵을 속삭였다. 보드라운 손이 내 숙인 머리 위로 올라 머리칼을 헤집고 있었다. 만으로 갓 열아홉 살이 된 나를 쓰다듬으며 열여덟의 소녀는 어른스레 웃었다.

"가람의 조국에 지지 않을 태평성대를 이룩할 거예요. 가람이 많이 도와줘요."

나보다 열 갑절은 더 총명할 이 아름다운 공주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았을까. 빈민굴에 숨어 살던 루시아가 이 자리까지 오른 것도 전부 위시와 루시아 스스로의 힘이었다. 뭐 하나 열심인 적 없다가 수능마저 망치고 여기로 도망쳐온 나라는 사람은 이제는 얄팍한 밑천이 드러나고 있었다. 잠시 잊었던 아찔한 실감이 몸을 덮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내게 남은 것을 세었다. 아무리 꼽아도 위시의 도움 하나가 고작이었다.

"오래도록 내 곁에, 내 조국에 있어주세요."

기어이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재촉하지 않으신 채, 공주님은 다만 그렇게 웃고만 계셨다.

알현실을 나와서 백일몽을 걸었다. 해가 저물어서야 저택에 다다랐다.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소녀의 마력이 느껴졌다. 위시.

이따가 얘기하자는 그 애 말이 이제야 떠올랐다. 뛰다시피 응접실로 향해 문을 열어젖혔다. 미안, 위시! 채 문을 열기 전부터 소리친 내 사과를 들었을테도 불구하고 대답이 돌아오질 않았다. 소파에 몸을 묻은 내 드래곤은 화를 내기조차 지친 것 같았다. 침울한 붉은 눈이 곧 초점을 되찾고 내게 향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

"그래서, 그 계집애가 뭐래?"
"누구? 루시아?"

뭐라긴. 우물거리는 내 기색에 위시는 힘없이 웃었다.

"넌 운도 좋아. 두 시간만 일찍 왔어도 반 죽여 놨을 텐데."
"미안. 아까는 내가,"
"근데 한가람, 진짜 웃긴 게,"

그리고 소녀는 내 목을 잡아챘다.

숨이 막혔다. 놀라 부릅떴던 내 눈이 이윽고 질끈 감겼다. 내게 와 카악! 꽂히는 위시의 붉은 눈동자가 감히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진짜 웃긴 게, 하고. 했던 말을 되뇌는 나의 어린 드래곤은 제 분을 못 이겨 떨고 있었다.

"난 네가 맨날 게임 같으니, 소설 같으니 하길래, 그게 멋있다는 뜻인 줄 알았거든?"

그랬었다. 위시가 처음 마법을 보여줬을 때도, 집체만한 드래곤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날았을 때도 그렇게 경탄했던 것이 떠올랐다. 게임 같노라며 탄성을 터뜨리는 내게 위시는 우쭐해 하면서도 기뻐 어쩔 줄을 몰라 나를 채근했다. "그치! 대단하지! 그치!"

"그게 날, 이 모든 걸 사그리 환상 취급하는 건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백 살. 용들 사이에서는 더없이 어린 나이라는 그 소녀의 얼굴이 이지러져 울먹이고 있었다. 처음 나를 소환해 놓고 얼 빠져 이편을 보았던 그 눈매,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리라 장담하던 그 자신만만한 눈매, 내가 들려주는 한국 이야기에 별빛처럼 아롱져 빛나던 호기심 어린 눈매에 이제 차차로 눈물이 맺혔다. 목이 죄인 것보다도 그 울음이 싫고 애틋하여 나는 몸서리를 쳤다.

"위시, 제발 내 말 좀,"
"입 다물어! 하등한 인간종족 머릿속은 용안[龍眼] 한 번에 가볍게 읽어낼 수 있으니까!"
"위시 너!"
"못할 것 같아!? 내가 이제껏 왜 안 그런 줄 알아!? 난 이제껏, 네가 나를 감히!"

감히 같은 인간으로 생각해 주는 줄 알았다?

말끝으로 소원의 이름을 가진 어린 드래곤의 첫 눈물이 뺨에 굴러내렸다. 떨고 울음 짓는 용안이 타오르듯 빛나며 나를 응시했다. 입 다물어. 재차 그리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하릴없이 입을 다물었다. 나도 울고만 싶었다. 이 바보 꼬맹아,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래서, 공주는, 그 계집앤 환상 안 같은가봐?"

억지로 이죽거리는 소리에 나는 헛숨을 뱉었다. 헛소리 마. 나는 지금 만사가 꿈같아. 일국의 공주를 내가 구해서 왕위에 올렸는데 정상적인 정신머리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외국어영역 미끄러진 재수생이 공왕직에 올랐는데,

"그래도 끝까지 공왕놀음 그만둔다는 말은 못했지?"

그건, 루시아 전하께 미안하니까.

"결국 걔만 네 현실이잖아. 왜 난 아니야?"

위시 넌 드래곤이잖아. 날개간 길이 20m, 최대상승고도 28000ft, 9서클 마법을 호흡처럼 자연스레 빚어내는 전능한 동물. 함께 다니는 180일동안 네가 일으킨 기적과 이능이 몇인데,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 줄까. 고등학교나 겨우 입학했을 어린애 동생 취급이라도 할까?

"나 봐, 한가람."

똑바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젖어들었다. 목을 죄던 손을 풀어 내 뺨을 만지는, 인간의 형상을 한 어린 드래곤은 주저앉았던 내 무릎 위에 올랐다. 붉은 머리칼이 내 어깨로 흘러내린다. 그 애는 잠시 말을 멎고 내 눈을 피한 채 가쁜 숨만을 몰아쉬고 있었다. 날숨마다 뺨에 닿는 뜨거운 입김, 나와 같은 체온을 지닌 아름다운 동물의 호흡에 나는 당혹하여 이름을 불렀다. 위시.

녀석의 손이 내 손목을 바투 쥐었다. 천천히 끌어올린 내 손을, 녀석은 자기 왼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보드랍게 부푼 어린 젖가슴이 손에 닿는데도 위시는 내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대로.

위시의 박동이 내 손으로 와닿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기색. 내 맥에 어울려 빠르게 뛰는 고동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오늘 내가 찔렀던 어느 적병에게서 흘러나왔던 뜨거운 피와 같은 것이 이 아이의 몸속에도 흐르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외면하고 있었던 실감이 등을 타고 올랐다.

"게임 같아?"

이를 악물고 묻는 위시의 속삭임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편을 훔쳐보는 붉은 눈동자가 젖어 울고 있었다. 몰아쉬는 숨결마다 봉긋한 가슴이 달싹이고 손끝과 품안 깊숙히 보드라운 몸이 닿아, 아름다운 입술은 떨며 더듬더듬 애틋한 단어들을 자아냈다.

"너 미워, 바보야――"

――정말, 정말 미워.

아프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위시의 모습은 사라졌다.

워프를 사용한 걸까.

소파에 주저앉은 채로 나는 내 품에서 사라진 체온을 좇아 입술을 깨물었다. 위시, 이 멍청이가. 되뇌는 내 목소리에는 되려 울음이 배었다. 녀석은 곧 돌아올 것이다. 돌아오면 나는 그 예쁜 얼굴에 어떻게 사과의 말을 속삭여야 할지. 처음 깨닫는 현실은 또 내게 무거운 짐들로 다가왔다. 더 이상 천방지축으로 굴 수가 없었다.

내가 발 딛은 지금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밤이 깊어오고 있었다. 어둔 밤하늘을 불밝히는 두 개의 달에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진절머리 나는 실감에 눈을 감았다.

언제나 되어야 동이 틀까.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덧글

  • 바시 2010/07/04 22:53 # 답글

    재...재미있어! 일단 주인공이 먼치킨이 아니라서 기분이 좋음요.
    생각해보니 이고깽 소설 중에는 고딩 주제에 작전을 잘 짜는 놈들이 너무 많...
  • kidovelist 2010/07/04 23:40 #

    사실 이른바 이세계 고교 깽판물에 등장하는 고등학생들은 "평범"과 거리가 좀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살인을 두려워하고, 이세계를 꿈처럼 여기다 뒤늦은 실감에 당황하는 진짜 "평범"한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려 했는데, 쓰다보니 잘 됐는지 조금 자신이 없기도 합니다. 아무튼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 존재 2011/06/24 14:00 # 삭제 답글

    BOK, 사애최, 아파테이아 다 찾고 후속 찾다가 들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건필하시는지요.
    그저 BOK AFTER를 기다릴 뿐이옵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