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발 딛은 지금 이곳, 다시 그대에게; 02 소설



사흘이 지나고, 공주님의 무릎 위에는 내 나라의 책들이 쌓였다.

교학사 법과 사회 교과서 한 권. 같은 과목의 숨마쿰라우데 참고서 한 권. 문원각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 한 권. 멘큐의 경제학 한 권. 책가방에 넣은 채로 수능시험장에 가져갔다가 얼떨결에 이 세계까지 품고 온 책들이었다. 들춰보기도 싫어 언젠가 떠안기다시피 전하께 드린 것을, 공주 전하는 기어코 내게 다시 들고 오셨다. 도대체 몇 달 만에 보는 지겨운 글들인지.

"공용어로 읽어줄래요?"
"전하, 이것들 전부 하나도 재미없는 것들인데."

당황하여 되뇌는데도 개의치 않고 전하는 내게 얼른 첫 책을 내미셨다. 법과 사회.

"대한민국의 선진문물을 배우고 싶어요."

금발벽안의 아리따운 공주님께서 내미시는 내 옛 교과서가 내게는 못내 어색했다. 공주님이 대표하는 찬연한 꿈과 법률유보니 노동3권이니 하는 잿빛 현실이 뒤죽박죽으로 섞이는 묘한 실감에, 나는 무심코 한숨을 쉬었다. 책을 받아 부록을 펼쳐들었다. 대한민국 헌법 백수십 개 조문이 눈앞서 아른거린다.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요. 왕도 귀족도 없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시는 전하께서는 아직 당혹한 기색으로 웃으신다.

"온 백성이 전부 나와 한 마디씩 하려면 도무지 아무 것도 못할 텐데요."

내 앞에 계신 공주님은 왕정국가의 수반이시다. 문득 위험한 구석을 건드렸다 싶어 나는 더듬거렸다. 민주공화국에서는 말입니다, 전하.

"보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사람이 왕좌 비슷한 자리에 앉습니다. 투표를 해서요."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재밌네요, 왕정제보다 합리적이고."

말끝으로 소녀의 눈매가 설핏 장난스레 나를 향했다.

"다만 그리 되면 나도 가람도 실업자로 나앉겠어요."
"저야 그렇겠지만 루시아는――, 아니, 죄송합니다, 전하께옵선,"
"그냥 루시아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난 가람한테 전하 소리 듣기 어색해요."

그러면 루시아는, 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탁 풀어져 웃어버렸다. 처음 만나 함께 다닌 백일동안 나는 이 소녀를 늘상 이름으로 불렀다. 다시 왕좌를 되찾고 나서는 죽 전하라고 높여 일컬으며 공주로서의 체면을 지켜드리려고 노력했지만, 그렇지만 루시아, 건방진 이야기일지언정 난 역시 이게 좋네요.

"당장 민주정 해도 루시아는 왕으로 뽑힐 거예요. 현군이잖아요."
"빈말이라도 기분 좋네요. 공왕노릇 하면서 아부가 많이 늘었어요, 가람."
"나 가식 잘 못 차리는 거 알면서 그러세요. 여기 국민 누구라도 루시아 사랑할 거예요."
"내 앞에 있는 사람도 그래 주나요?"

말문이 막혔다. 잠시간 멍하니 내 앞 고운 사람을 마주보던 나는, 이윽고 당혹한 얼굴이 되어 그러나 필자로 진심을 고백했다. 네, 루시아. 저라고 감히 다르겠습니까――. 햇살을 망토처럼 두르신 나의 공주께선 대답지 않으셨다. 새초롬히 고갤 숙이고 예의 하늘같은 푸른 눈으로 엷게 웃으시며.

"위시 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네요."

네, 통 돌아오질 않네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영영 떠난 건가요?"
"아니에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아직도 그 탐욕스런 용에게 매인 몸인가 보군요."

저는 위시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인걸요. 힘없이 웃는 나를 두고 루시아는 목소릴 높였다. 가람 나는, 하고. 잠시 이을 말을 잊어 입술을 깨물었던 내 공주는 여신 같은 지체를 일으켰다. 구두를 벗어둔 새하얀 맨 발이 바닥에 닿았다. 한 걸음.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고작 전술 수준에 머무는 그 용의 알량한 마법이 아쉬울까봐?"

다시 한 걸음.

"마법과 기적은 지금까지 베풀어준 걸로 충분해요. 나 이제 내 자리 찾았고, 용은 필요 없어요. 힘도 타격도 이제는 내 왕국이 대신 할 수 있어요. 곁에 있어요, 가람."
"위시가 없으면, 루시아, 도대체 내가,"
"무한한 가능성을 잉태한 미래에의 관념이, 미래 그 자체보다도 중요한 것으로서, 소유보다도 희망에, 현실보다도 꿈에 한층 더 많은 매력이 발견된다. 가람이 해 준 말이었지요?"

앙리 루이 베르그송의 격언이었다. 언젠가 학자연하려 들려주었던 것을 루시아는 이태껏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총명한 사람.

"내게, 내 조국에 이데올로기를 주세요. 그곳까지 나아갈 방법을 함께 고민해요. 가람의 꿈을 나누어 베풀어 주면, 그것만으로 나와 내 조국은 충분하고도 벅차요. 가람은 자기가 얼마나 매력 있는 사람인지 자각해 주었으면 좋을 텐데――……"

말을 잊고,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 줄도 모른 채. 무심코 책을 떨어뜨린 나는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들었다.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춘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가람.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르는, 웃음기 사라진 소녀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스스로 한 말이 얼마나 부끄러운 말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은 양.

"루시아,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 이상 무언가 다른 걸 청하면,"

살폿 내 어깨에 닿았던 작은 손이 올라 내 뺨을 감쌌다.

"그러면, 화 낼 건가요, 가람?"

설마요. 더듬더듬 자아낸 말에 루시아는 달아오른 고운 얼굴로 새초롬 미소를 머금었다. 이윽고 눈을 감아 긴 속눈썹을 드리운 공주께옵선 내 품에 작은 몸을 묻었다. 입을 맞춰왔다. 엷은 아카시아 향기가 서슬에 내게로 쏟아졌다.

만난 이래로 가장 깊게 안아본 나의 꿈이자 내 가장 소중한 현실은, 나 따위와 같은 종에 속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따뜻하다. 입술이 떨어져 잠시 서로 달뜬 숨이 흘러나오고, 모양이 쑥스러운지 루시아가 설핏 웃고 나도 못내 따라 웃는다. 그리고 다시, 보다 깊게 입맞추며 나는 그 사람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균형을 잃고 무너지듯 내 무릎에 앉은 공주께선 그러나 화내는 기색 없이 짐짓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애틋하고 미쁘게. 일순,

루시아가 내 품에서 벗어났다. 아니, 잡아채였다.

목덜미를 잡아 힘껏, 루시아를 내동댕이친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낯이 익었다. 우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어린 얼굴에 나는 일어서 비명을 쳤다. 위시.

"위시, 너 왜 여기――"

위시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무력하게 쓰러진 루시아를 덮쳐, 어깨를 찍어누른 위시는 언제부터 울었는지 모르도록 온통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띤 그 전능한 동물은 이윽고 통곡성을 참아 이를 악물었다.

"공주? 웃기고 있어, 이 창녀가."

저게 또 무슨 말을 하는지. 숨이 얼어붙은 나는 있는 힘껏 위시의 손을 잡아챘다. 위시, 우리 나가서 이야기하자. 뭐하는 짓이야 이게. 제발, 위시. 거듭 타이르며 떠는 내 목소리가 허공중에 흩어지고 되려, 어깨를 찍어 눌린 루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창녀라니, 상당히 재밌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위시 경."
"창녀 아니면 뭐야! 몸으로 사람 꼬여내서 제 멋대로 부리려는 게!"
"루시아, 미안해요, 잠깐만 기다려요! 위시 당장 그 손 안 놔!?"
"한가람 넌 입 다물어! 채 다 자라지도 않은 창녀 부리는 수작에 넘어간 주제―― 꺄아악!"

위시의 비명을 따라 마력이 준동했다. 폭발했다, 쿵! 전능을 자부하는 기적과 마법의 동물에게 마력을 쏘아 맞춘 루시아는 그대로 위시를 반대편 벽에 처박아버렸다. 놀라 숨이 막힌 나를 놓아둔 채로 그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탁상에 올려놓았던 왕가의 검을 검집으로부터 뽑아 올렸다. 시퍼런 마력을 머금은 신화급 보검, 적법절차의 검[Sword of Dueprocess]이 바닥으로 드리웠다.

긴 속눈썹 아래로 날아 박히는 루시아의 푸른 눈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빛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소리쳤다.

"내가 당신 종족, 이른바 용이라는 족속들을 마음에 안 들어하는 이유가 여럿 있는데!"
"죽일 거야."

이를 악물고 되뇌는 목소리는 위시의 것이다. 가까스로 일어선 위시는 온 마력을 휘어잡아 집어삼키고 있었다. 손끝으로 맺히는 마력이 확실히 사살을 목표로 하는 양.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세상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여기는 탐욕, 편견, 제가 전지전능한 줄로 착각하는 오만!"
"감히 스무 해도 못 산 인간이 용의 것을 탐내!?"
"감히 채 한 세기를 산 애송이 용 나부랭이가 육십 세기를 이어진 왕가의 핏줄에 덤비겠다는 말이지요! 그 어쭙잖은 마법에 기대어, 가소롭게!"
"전부 태워버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인간 공주에게, 용은 왈칵 울음 같은 고함을 뱉었다.

"가람이만 남기고! 사그리!"

전소의 불꽃이 위시의 손끝으로부터 벗어났다. 날았다. 혀를 날름거리는 화마가 루시아에게로 향하는데, 루시아는, 내가 구하려는 틈조차 주지 않은 채로 입술을 열어 주문을 뱉고 있었다. 적법한 절차에 의하여, 나와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해, 즉시, 확실하게, 그리고 종국적으로――

이윽고 종으로 그어진 은빛 칼날이 덮쳐오던 위시의 불꽃을 쓸어버렸다.

콰앙!

화마가 단숨에 허공중으로 흩어졌다. 정당방위의 검리를 따라 열기를 쓸어 헤치고, 루시아의 하얀 발이 마루를 박찼다. 어릴 때부터 왕실서 검술을 배웠노라던 그 사람의 도약은 비호를 닮아 있었다. 단 컴마 원 세컨드로 두 사람 사이 격지는 영점에 수렴되었다. 기적처럼. 가슴높이로 끌어올린 검이 위시의 목을 노리고 길게 호선을 그어,

"루시아!"

나는 가까스로 그녀의 손을 끌어쥐었다.

위시의 목을 스치고 날았던 칼날이 멈췄다. 조금만 더 깊게 그었으면 위시의 목숨을 빼앗았을 그 칼에 벌써 핏빛이 베어들고 있었다. 쇠골에 긴 상처가 난 위시는 멈췄던 숨을 뱉고, 이윽고 폭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아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분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람, 손 놔요. 이 탐욕스런 용이 다시는 눈앞에 못 나타나게 해 줄 테니까."
"대신 사과할게요. 죄송해요, 전하, 그러니까 제발,"
"대신 사과하지 말아요! 왜 가람이 대신 사과를 하나요!? 이 용이 대체 무엇이관대!"

이를 악문 목소리가 나를 때렸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제발, 전하. 애원하는 소리를 따라 루시아는 힘없이 칼을 내렸다. 나를 노려보는 푸른 눈이 젖은 채로.

"바보 같아."

문득 위시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우리 둘 다 쟤한텐 안중에도 없는, 한바탕 꿈일 텐데."

되뇌는 내 어린 용의 어여쁜 얼굴엔 어찌 할 바 모르는 설움이 배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얼른 속삭이며 잡아오는 내 손을 뿌리쳐, 위시는 꼭 입술을 깨물었다.

"한가람, 너 돌아가."
"무슨 소릴 해, 꼬맹아. 돌아가긴 무슨,"
"한국으로 돌아가. 네 현실로."

잠시 말문이 막혔던 나는 이윽고 눈을 찌푸렸다. 확실히 나는 이 녀석에게 미움을 사긴 단단히 산 모양이다. 자기 입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던 얘기를 왜 이제 와서. 또 내 머릿속을 읽었는지 위시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서슬에 붉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아냐, 가능해. 차원을 넘는 동안 내가 같이 계속 옆에 붙어서 좌표를 유도하면 돼."
"당신이 꼭 같이 가주기라도 할 것처럼 이야기하네요. 입 바른 소리 말고 당장 사라져요."
"같이 갈 거야."

쏘아붙이는 루시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위시는 오롯이 나만을 바라 힘주어 속삭였다. 같이 갈 거야. 혹시 들리지 않았을까봐 그렇게 되뇌는 위시의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그 얼토당토않은 제안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위시, 너 도대체 왜 그래.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낯선 대한민국까지 나 따라 와서 어쩌려고.

"같이 가서 네 현실의 일부가 될 거야."

작은 손을 올려 내 옷깃을 쥔 나의 어린 용은 어여쁜 붉은 눈으로 나를 올려보아 입술을 연다. 밀랍처럼 달콤한 달뜬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가서도 너 도와줄 수 있어. 도와줄게. 네가 망쳤다는 수능 따위 영영 보지 않고도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 줄게. 내가 가진 황금, 보화, 이룰 수 있는 기적이라면 무엇이든―― 한가람, 나 데려가. 나도 갈 거야."
"잠깐만, 위시,"

입을 열고도 나는 무슨 답을 뱉어야 할이지 몰라 떨었다.

"제발 잠깐만 기다려, 나,"
"데리러 올게. 그동안 난 준비 하고 있을 테니까,"
"아니, 가지 마. 나랑 얘기 좀 해! 위시 너!"
"보름 후에――"

그렇게만 속삭이고 위시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도망치듯 사라졌다. 몰아친 마력이 워프 마법을 따라 흩어졌다. 내 가슴에 담아두었던 수백 수천 수억 마디의 말은 채 갈 곳을 잃고 헛숨으로 나왔다. 위시.

방은 비어 나와 루시아만 오도카니 남았다. 내게 입맞춤했던 그 소녀의 벚꽃빛 입술이 잠시 열렸다가 꼭 깨물렸다. 그리고 나는―― 나는, 루시아,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속삭여야 하는데. 자칫 거짓말이 될 그 자신 없는 다짐을 차마 뱉지 못해서 나는 하릴없이 아픈 머리를 괴었다.

"내가 용이라는 자들을 마음에 안 들어하는 이유가 여럿 있다고 했지요."

문득 내 곁에서 그렇게 속삭이는 루시아의 목소리가 차게 젖어 흘러내렸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라면 무엇을 주고라도, 무엇을 포기해서라도 기어코 가지려 드는 저 집착과 열정과 순수가 너무 싫고 부러워서, 그래서 나는 싫어요, 공왕."

나는 그리 못할 터인데. 잇달아 말을 자아내면서도 루시아의 쪽빛 눈동자는 끝내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돌아서 비틀 방을 나가는 루시아의 옷자락을 나는 잡지 못했다. 잡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떠올리지 못했다. 기어이 홀로 남아 이를 악문 채로 주저앉았다.

이왕 이곳을 현실로 받아들였으니 이제까지처럼 줄곧 달콤하기만 하면 좋았을 텐데.

그로부터 보름동안, 나는 열병을 앓았다.

어느 서슬에 걸린 병인지. 빈 저택 넓은 침대에 누워 열에 들뜨고 가쁜 숨을 쉬면서도 나는 외롭고 힘들어 스스럼없이 울었다. 내 곁에 있어줄 가족과 나를 걱정해줄 친구들이 가득한 내 세계, 내가 살던 대한민국은 차츰 아픈 내 가슴 가득히 그리움으로 차올랐다.

위시는 나를 따라와 내 곁에 있어줄 것이다. 루시아는 이곳에 남을망정 일국의 공주다. 어디 한 군데 부족한 점을 찾을 수 없는 살아있는 기적과도 같은 그 사람은 나 하나 없어도 뜻대로 잘 해나갈 것이다. 이제 이 세계에서 내게 남은 일은 없다. 없어야 할 텐데.

보름이 지나 위시가 약속했던 날이 밝았다.

몸은 간신히 나았다. 마음도 다잡았다. 도망치지는 않기로 했다. 루시아에게만은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용서를 빌고 싶었다. 왕궁에 가야 했다.

옷장 한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내 모교의 갈색 교복을 꺼내 걸치고, 목이 죄이도록 넥타이를 졸라매고――, 은실로 망토마다 무궁화를 수놓은 공왕의 푸른 예복들은 모두 차곡차곡 개켜 탁자 위에 올렸다. 루시아의 서명이 든 책봉서도 그 사람이 선물한 보검도 전부 꺼내 풀어놓았다. 이제 내게는 더 이상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내 손으로 버린 것들이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자 교복을 입은 말간 얼굴, 어디고 있을 법한 평범한 고등학생 한 명이 이편을 보고 있었다. 젊은 공왕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긴 꿈이 깨었다.

밖에 나서자 거리가 소란했다.

내 탓은 아니었다. 저택부터 왕궁까지 온통 움치고 뛰는 관료진과 장교단은 나를 눈치 챌 틈도 없이 바빠 보였다. 내궁에 들자 시녀들이 급히 머리를 숙이고 비켜섰다. 복도를 뛰는 경비병들이 급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들 사이로 불길한 어휘들이 들렸다. 기사단, 돌격, 종심방어작전, 총동원령 등등. 오싹 끼쳐오는 소름을 참으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전하, 공왕 각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아뢰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에 있던 장성들이 섬칫 놀라 나를 보고, 썰물처럼 비켜 도망쳤다. 집무실 커다란 탁자 끝에 오도카니 서 있던 루시아는 잠시 망연했다가 이윽고 힘없이 웃었다. 숨기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뇌는 내 공주께옵선 은빛 흉갑을 입고 계셨다.

"루시아! 그 갑옷 다 뭐예요!?"
"전투가 있어요."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 사람의 목소리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우회한 제국군이 이곳으로부터 반 시진 거리에 도달했어요. 맞서 싸워야지요."

말끝으로 설핏 눈을 든 루시아는 나를 마주했다. 하늘같은 쪽빛 눈동자 가득히 나를 담고 아로새겼다. 그 입술이 열려 내 이름을 불렀다. 가람 나는, 하고. 이어서 무슨 하기 힘든 말씀을 가슴에 담고 계시는지, 공주께선 이윽고 말을 삼켜 침묵을 노래했다. 배꽃 같은 하얀 손이 들려 내 뺨을 감싸고 있었다.

"가람은 이제 가람의 세계로 돌아가는 건가요?"
"나, 나 전쟁 얘기는 듣지도 못했어요! 알았으면 이렇게 안 떠날 텐데!"
"알아요. 그러니까 말 안 했어요. 들으면 억지로나마 내 곁에 남아줄 것 같아서."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가요. 바랐던 꿈은 나 혼자라도 이루도록 노력해볼게요. 치열하게 싸워서 마침내 이룩할게요. 잘 해낼 수 있어요――, 잇달아 속삭이는 루시아의 앳된 목소리는 나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차츰 내 가슴에 잊었던 설움으로 젖어들었다. 뺨에서 손을 내려 내 교복 깃을 쥔 그 사람은 꿈결 같은 기색으로 웃고 있었다.

"그 옷 입은 모습도 오랜만에 보네요. 가람의 학교에서 입는 제복이라고 했지요."
"루시아, 그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목에 맨 그 띠 내게 풀어줄래요, 가람?"
"내 말 좀 들어요 루시아! 나 안 떠날 거예요!"

왈칵 울음이 솟은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떠날 생각 없으니까 제발 그런 식으로 나 보내려고 하지 마요!"

루시아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그 사람은 이윽고 설운 얼굴 가득히 얼른 착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마워요. 그렇게만 속삭이고 나의 사랑하는 어린 공주께서는 내 셔츠 깃에서 넥타이를 풀어냈다. 훔쳐낸 그 보잘것없는 긴 띠를 소녀는 꼭 품에 안았다.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세요."
"루시아,"
"내 말 들어요, 가람."

멈칫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던 나는 지긋이 나를 올려보는 푸른 눈에 이윽고 입술을 깨물었다. 원하시는 바대로 무릎을 꿇었다. 내린 눈높이 아래로 루시아의 구두가 내게로 다가왔다. 소녀의 막힐 듯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귓가로 맴돌았다.

"정표를 줄게요."

탁상 위에서 쇳소리 나는 무언갈 드는 기색이 나고,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가도 꿈을 기억할 수 있도록."

내 머리 위에 무거운 것이 올랐다. 놀라 무심코 눈을 들자 나를 마주보는 루시아의 푸른 눈에 눈부신 별빛이 아롱졌다. 엷게 웃은 그 사람은 옆에 놓인 거울을 들어 내게로 향했다. 거울 안으로 찬연한 은세공의 관을 쓴 내 모습이 비쳤다. 왕관이었다.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요. 당장은 아무 것도 줄 게 없어서――"

되뇌던 루시아는 내게로 다가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스스럼없이 꿇어앉았다. 나와 눈을 맞추고 어여쁜 미소를 머금었다. 가람.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른 공주는 내 뺨에 보드라운 입술을 가져다 맞췄다. 가는 팔이 나를 끌어안고 날씬한 어깨가 가만히 떨며 있었다.

좋아했어요. 그리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공주님의 젖은 목소리를 따라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나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익숙한 향기, 위시의 마력이었다. 그 아이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약속마따나 보름 째 되는 시일.

뒤이어 소환의 충격이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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