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발 딛은 지금 이곳, 다시 그대에게; 03 소설


나와 이어진 굳센 라인을 당기는 위시의 술식은 곧 나를 허공간으로 잡아챘다. 일백 킬로미터 넘는 거리를 단숨에 접은 마력이 준동하고 흩어졌다. 그 긴 거리를 따라 일순으로 나를 불러낸 막강한 술식은 확실히 용에게나 가능한 권능이었다. 이윽고 모든 마법이 멈추고,

눈을 뜨자 낯익은 풍경이 보였다. 위시의 둥지였다. 평소보다 더한 마력과 신비로 요동치는 그곳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온통 정교한 매직스퀘어를 아로새긴 채 빛나고 있었다. 꼬박 보름 만에 이 모든 이적을 준비하고 그 가운데 선 위시는, 지금껏 무얼 본 건지 성난 얼굴이었다.

"보고 있었어?"
"안 봤어, 멍청아."

묻는 말에 대뜸 그렇게 골이 나 대답하는 기색을 보니 정말로 죽 훔쳐보고 있었던 양. 나는 쓰게 입술을 깨물고 몸을 일으켰다. 뱉는 목소리가 한숨처럼 터졌다.

"미안하다."
"드디어 미안한 줄은 알았으니 다행이네."
"그게 아니라 나, 한국에 못 돌아가."

위시는 잠시 멍하니 나를 마주보았다. 채 알아듣지 못한 듯, 뭐? 하고 되묻던 내 어린 용은 이윽고 소스라치게 놀라 얼굴을 들었다. 경악으로부터 설움과 미움으로 바뀌려는 녀석의 얼굴이 더없이 아팠다. 그래도 참을 말이 아니었다. 힘주어, 곧게,

"위시 네 말이 맞아. 여기 엄연한 현실이야. 알았어. 아니까 못 떠나겠어. 지금 떠나는 건 도망치는 것 밖에 안돼. 나 이제껏,"

차마 말을 삼킨 채로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이제껏――, 무엇 하나 절실하게 해본 적 없는 내게 처음으로 한 번 치열하게 다퉈야 할 전장이 닥쳐왔다. 겁이 난다. 피하고 싶다. 도망칠 길마저 열려있는 와중, 이에 공포를 이겨내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그냥 루시아 그 계집애 때문이라고 하면 될 걸, 빙빙 돌려서도 말하네."

입안으로 중얼거리는 위시의 입술은 이윽고 울음을 참으려고 힘껏 깨물렸다. 이편의 시선을 피하는 녀석의 어여쁜 눈매에는 미움과 설움이 맺혀 뚝뚝 떨어졌다.

"멋대로 해. 근데 한가람, 너 여기서 나가면 내 얼굴 다신 볼 생각 하지 마. 그리고――"

나는 위시의 말이 더 이어지길 기다리지 않았다. 단숨에 녀석에게 다가서 여린 어깨를 잡아챘다. 처음으로 당하는 기습에 위시는 말을 삼켰다. 놀라 이편을 올려보는 녀석의 저 아름다운 눈은 용안[龍眼], 진심을 꿰뚫어 본다는 전지의 눈이다. 비로소 마주친 그 붉은 눈동자를 향하여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속삭였다.

위시, 내 생각 읽어.

기세에 눌려 꼬빡 고개를 끄덕이는 위시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머리와 가슴으로 긴 방백을 노래했다. 위시,

미안해, 위시. 그리고 고마워. 지금까지 나 도와주면서 곁에 있어준 것도, 나 따라와 준다고 했던 것도 전부. 한국까지 안 와도 괜찮아. 내가 여기 남아서 계속 내 가장 사랑하는 용한테 지금껏 내가 받았던 것들 되돌려줄게. 위시 네가 원하는 거라면, 네 바람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게.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 어딘가 붕 뜬 것처럼 어설프고 이상하지만 내 나름대로 노력할게.

내가 네게 현실보다 매력적인 꿈이 되어 줄게.

위시는 대답지 않았다. 숨을 삼키고 내 눈을 마주보던 그 어여쁜 용은 차츰 달아오르는 뺨으로 어쩔 줄 몰라 꼭 입을 다물었다. 빨개진 얼굴은 이윽고 눈을 피하고 고갤 숙여 폭 숨어버렸다. 거짓말쟁이. 그렇게 억지로 종알거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달콤해서 어쩔 줄 모르고 흩어졌다.

"이번 한 번만 속아주는 줄 알아,"

말끝으로 설핏 든 예쁜 눈이 우는지 웃는지 모르도록 이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딱, 이번 한 번만――……"

그리고 위시는 내 손을 잡아챘다.

작은 손 보드라운 손가락들이 내 못난 손에 깍지를 걸고 나를 잡아끌었다. 맞닿은 살결에 향그러운 땀방울이 맺히는데, 위시! 놀라 외치는 나를 무시하고 위시는 고운 목소리를 높였다. 날아라. 날아라. 날아 하늘 끝까지 이르러,

일순 위시의 몸을 휩싼 마력이 내 어린 용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고 있었다. 둥지 높은 곳까지 거대한 날개가 솟고, 타는 듯한 붉은 색 거대한 드래곤의 지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이제는 무작정 놀라지 않을 만큼은 익숙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적과 꼭 빼닮아 날씬하고 어여쁜 녀석만의 품새를 알아볼 만큼은――. 꿈과 전설이 빚어낸 내 눈 앞 세상 가장 아름다운 기적은 찬연한 용안으로 설핏 나를 내려보고, 나는 때도 잊고 웃고야 말았다.

"예쁘다, 위시."

녀석은 대답지 않았다. 다만 핏, 내 눈을 피해 토라져 고개를 돌렸던 녀석은 대뜸 내 옷 뒷덜미를 이로 물었다. 몸이 들려 올라가는 느낌이 났다.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 녀석 하는 일이니까. 활개 치는 기색에 섞여 마력이 준동하기 시작하고,

다시 워프가 개시되었다.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단숨에 백수십 킬로미터를 뛰어넘는 기적같은 대단위 워프. 술식의 전개를 알아챈 즉시 나는 위시의 둥지를 벗어나 새파란 하늘 한가운데로 던져졌다. 땅을 딛던 발밑이 비고, 오로지 내 옷깃을 문 위시의 앞니만이 몸을 지탱해 올렸다. 끝없는 광야와 지평선이 발밑으로 펼쳐졌다. 우리는 날아올랐다.

"저깄네, 그 계집애."

머릿속으로 전해져 토달거리는 위시의 목소리를 듣고, 멈칫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곳에 전쟁이 있었다. 땅 위 가득 어느 곳이고 격전이었다. 이편까지 들리는 찌를 듯한 고함과 쇳소리에 어울려 깃발들이 나부끼며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편, 높은 곳에 루시아가 보였다.

허리를 곧게 편 그 사람은 푸른 술이 달린 투구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다. 이지 넘치는 쪽빛 눈을 내리떠 빛내는 자태가 오싹하도록 아름다웠다. 저보다 훨씬 키 크고 노회한 장성들을 줄줄이 거느리고도 한 점 위축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중앙 대오로 치받아오는 적 선봉을 눈앞에 둔 공주께선 보검을 뽑아들었다. 휘어잡은 주인을 닮아 찬란한 은빛으로 새파랗게 날 선 적법절차의 검이 대기를 짓찢어 백색광을 발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싸울 거야?"
"싸워야지 어떡해, 그럼."

어울리지 않게 웃어 보이자, 위시는 기어코 폭 한숨을 쉬었다.

"그럴 줄 알았어. 멍청이. 너무 설쳐댔다고 엄마 아빠한테 나 혼나면 다 네 탓인 줄 알아."
"미안, 위시. 굳이 나 따라 고생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얼뜨기 반쪽짜리 5서클 마법사가 무슨 건방진 소리를 하는 거야?"

타박하면서도 밉지 않게 샐죽 웃은 녀석은 얼른 몸에 마력을 둘렀다. 재차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작아진 이로 아직 내 덜미를 물고 놓아주지 않은 채 얼른, 장난스레 내 머리에 콩 이마를 찧고는.

꼭 내 곁에 붙어 있어.

다짐받은 위시는 내 팔밑으로 나를 안았다. 점멸했다. 치솟았던 고도를 단숨에 수렴시키고 저 지옥 같은 땅 위 격전지로,

이곳에 온 지 반년하고도 꼬박 열여드렛날, 나는 전장 한가운데 섰다.

데시벨로 감히 따질 수 없는 가쁜 발소리, 말발굽소리, 무언가 쓰러지고 고함치는 소리가 잇달아 발끝 땅으로 우레처럼 울려 퍼진다. 사방천지가 죽음으로 가득한 전장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섞이고 아우러져 고함치고 있었다. 죽어라. 죽어라. 온 힘을 다하여 활주하는 전신갑주의 기사들은 탄환처럼 전장을 갈라 날고 맞받아 부수며――, 푸른 하늘을 가리고 저 높은 곳에 드리워 치열하게 나부끼던 그룬트레히트[Grundrecht] 근위대대의 깃대가 비명 중에 기울고 있었다.

"한가람 넌 눈 감아!"

소리친 내 어린 용은 섬섬옥수를 들어 일순 대기 중 모든 마력을 잡아챘다. 기적이 시작되었다. 불꽃의 벽이 치솟아 적진 한가운데를 가르고 일순 고기 타는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아가 전방으로. 다섯 열 수십 횡 적병이 섭씨 천수백도 화마에 사그리 증발하고 쿵, 쿵! 잇단 폭음마다 창칼들이 퉁겨나갔다. 발을 끌어 길게 한 바퀴를 도는 위시의 붉은 머리칼서 땀방울이 흩어졌다. 이은 굉음. 반대편서 달려들던 보병들의 몸이 시커멓게 타 나가떨어지고, 위시의 입술선 억누른 한숨이 흘러나온다.

토악질을 참아 이를 악문 나는 그러나 절대 눈을 감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맞서겠노라고 공언한 사람이었다. 기어이 손을 뽑아들었다. 눈을 부릅뜬 채로 앞선 죽음들을 노려보았다. 마법을 구했다. 마력 대비 파괴량에 관한 기술함수 도출. 등효율선 도출. 접점 도출. 최적균형 산출. 균형조합에 따라, 발사.

콰앙!

마력탄이 코앞 어느 적병의 머리를 꿰뚫었다. 관통한 마력탄은 거듭 몇 번을 나아가 또 여럿 몸을 박살냈다. 사람 생명 빼앗는 일이 소름끼치게 쉽기도. 산산이 부서져 튀어나가는 한때 호흡 깃들었던 살점들을 보며 나는 심장을 뒤흔드는 공포와 슬픔을 있는 힘을 다해 견뎌냈다. 숨을 집어삼켜 터질 듯한 폐에서 끝내 피비린내를 쏟지 않고 기어이 그 냄새를 참았다. 무릎을 꺾지 않은 채로,

"그냥 눈 감고 있으면 알아서 끝내 놓으려고 했는데, 사서 무리하고 있어."

떠는 내 어깨를 안아내며 위시는 못내 투덜거렸다.

"한 명 죽여 놓고도 겁난다면서."
"아니, 아니야, 괜찮아. 어떻게 너한테만 맡겨놓고 있어, 이 짓거리를."
"괜찮기는.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다니까. 떠는 목소리를 자아내며 나는 다시 손을 들었다. 폭 한숨을 쉰 위시는 얼른 내 앞을 막아섰다. 나를 대신해 마법을 발했다. 어느 적병의 목숨을 불살라 빼앗는 내 어린 용을 외면한 채로, 나는 루시아가 외던 정당방위의 검리를 온 신경으로 따라 되뇌었다. 나와 타인의 정당한 이익에 대한 현재의 침해를 방위하기 위해, 즉시, 확실하게, 그리고 종국적인 수단을 택하여――,

"위시, 쏜다!"

있는 힘을 다한 고함과 함께 내 마력탄은 쿵! 한 개 열 적진을 통째로 뚫어 핏빛 길을 개척했다. 놀라 동그랗게 떴던 붉은 눈이 얼른 나를 흘겼다. 바보. 조그맣게 열린 위시의 입술이 그렇게 속삭인 것 같았다. 돌아선 그 어린 용은 이윽고 최강의 화력을 끌어냈다.

손을 든 방향으로는 마법과 기적이 날고, 뺨을 달구는 화마가 수백 수천 수억 목숨을 연달아 불사르며 전진한다. 근위대를 향해 육박하는 제국군은 바다처럼 아득하다. 폭음과 비명이 연달아 울리는 와중, 나아가려면 모세가 되어 저 머리 검은 동물들의 바다를 핏빛으로 닦고 갈라내야 했다. 푸른 술의 투구를 쓴 공주께옵서 바다 너머에 있다. 루시아는,

루시아는 적법절차의 검을 드리운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발 앞에 겹겹이 죽음들을 두고도 휘영청 돌아선 검에 또 한 병사를 베어, 피를 뒤집어 쓴 그 사람의 날씬한 어깨가 움츠려 떨었다. 눈매 가득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게 담기고 흘러내린다. 밀려온 악의에 어린 날개를 적신 공주는 지쳐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이윽고 작은 몸 앞으로 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설핏 앞에 선 거구, 시커먼 전신갑주를 두른 흑기사를 바라보며 루시아의 입술선 울음 같은 한숨이 터졌다. 루시아,

"루시아!"

비명친 내 목소리가 닿질 않았다. 흑기사의 양손검이 적법절차의 검에 막혀 불꽃을 퉁기는 와중,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숨을 삼키며 무슨 신음인가를 흘리는 위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뛰쳐나갔다. 마법을 준비해 내 오른손 가득히 내가 이루어낼 수 있는 기적을 담았다. 가야 했다. 어떻게든,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루시아, 기다려. 혼자만 싸우지 말고 제발 잠깐만. 루시아!

적법절차의 검이 루시아의 손을 벗어나 땅에 굴렀다. 손이 빈 공주께서는 날아드는 양손검에 맞서 이를 악물고 마력을 돌리셨다. 좌측으로 둘러친 철벽의 실드에 양손검이 부딪히고, 대질량이 이윽고 그마저 날려버렸다. 작은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반대편 바위로, 쿵! 있는 힘껏 처박힌 그 사람의 입에서 피가 튀는 것이 보인다.

비명을 치려 드는 내 입으로 위시의 손이 덮였다.

소리가 새어 흑기사에게 들리지 못하도록. 붉은 머리칼이 길어 아름다운 소녀는 나를 안아 넘어뜨렸다. 전장이 아래로 사라지고 대신 파란 하늘이 머리를 덮었다. 내 가슴 위에 올라 꾹 내 어깨를 누른 채로, 그 아이가 젖은 눈을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원시룡[Ancient Dragon]이야."

속삭이는 내 어린 용의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저 흑기사, 사람이 아니라 원시룡이란 말이야. 천 년을 넘게 산 괴물."

가면 안 돼. 제발 가지 마. 꼭 루시아를 살려야겠으면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어떻게든――, 속살거리는 위시의 어린 얼굴이 설우고 무서워 떨고 있었다. 울음을 삼킨 소녀는 별빛 아롱진 붉은 눈을 내게로 드리웠다. 내 입을 막았던 손을 살포시 떼었다. 입이 열리자마자 나는 왈칵 녀석의 이름을 외쳤다. 위시, 너!

이어 말과, 숨과, 생각이 모두 멎었다.

더한 무엇도 자아낼 수 없도록 내 입가에 부드러운 것이 닿아왔다. 날개를 접어 품으로 내려앉은 소녀는 내게 입술을 포개고, 함초롬히 눈꺼풀을 내려 그 아름다운 용안을 안으로 감추었다. 내 어깨를 품어 꼭 안기는 작은 몸으로부터, 뺨으로 입안으로 흘러드는 어리고 달뜬 숨결로부터 가쁜 고동이 흔들렸다. 한 세기를 살았다는 내 어린 용의 첫 입맞춤은 어딘가 어설프고 영문 모르도록 애틋하여, 더할 나위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잠시 나를 놓지 않은 채 떨던 지체가 차츰 물러났다. 떨어진 입술에서 한 번 향그러운 숨결을 뱉은 위시는 내 귓가로 다가왔다. 속삭였다.

"도망쳐. 루시아 데리고. 내가 시간 벌어볼게."
"위시, 저거 원시룡이라면서, 너도 상대 못할 괴물이라면서 어쩌려고――,"

그럼 어떡해. 내가 안 이러면 한가람 너 혼자 가서 날뛰다가 죽을 거잖아. 토달거리는 위시의 말을 차마 아니라고 잡아뗄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문 채로 저 고운 얼굴을 우러러 나는 내 소원을 빌었다. 위시,

"조심해, 위시. 제발 조심해. 다치지 말고, 정 위험할 것 같으면 너도 도망쳐."
"안 죽을 테니까 걱정 마. 나 죽으면 너랑 그 계집애 깨 쏟아질 거 눈꼴시어서 어떡해."
"절대 다치지 마. 절대로. 알겠지?"

위시는 대답지 않았다. 청천을 머리에 인 소녀는 다만 얼른 나를 안아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몇 마디 밀어를 속삭여 내 귀를 간질였다. 알았어. 고마워. 사랑해. 잇달아 뱉는 몇 마디 말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나는 얼른 그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이윽고 위시의 지체가 내 품에서 벗어났다. 일으켜 전장 한 가운데 섰다.

그 여린 어깨에서 온 하늘을 뒤덮는 붉은 날개가 솟았다. 반인반룡의 지체는 손을 뻗어 대기중 마력을 온통 끌어모아 낚아챘다. 섬섬옥수에 끌어쥔 마력이 타오르는 불꽃의 창이 되어 잡히고 하늘 저편까지 치솟은 거대한 창대가 타는 듯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홉 단계의 신비 중 가장 마지막 단계, 9서클에 속하였을 그 거대한 롱기누스의 창을 끌어올린 채로 내 어린 용은 눈을 치떴다. 천 년을 살았다는 원시룡의 앞에 서 당차게, 온 힘을 다해 소리쳐,

"흑기사!"

일순 위시에게로 흑기사의 눈이 향했다. 면갑 안에서 빛나는 눈이 이편에서 보기도 용안이었다. 쌓인 세월에 만년설처럼 얼어붙은 차가운 눈은 위시의 정에 겨운 그것과는 사뭇 다르고도 몇 갑절은 강력했다. 위시는 물러서지 않았다. 재차 뱉는 고함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나는 붉은 용 일족, 아서와 한나의 딸 위시다! 당장 그 계집애한테서 손을 떼고!"
"애새끼 하나가 인간들 사이에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다 하더니마는,"

흑기사로부터 소름끼치는 조소가 터져나왔다.

"어느 안전인지도 모르고 입을 놀리니 가소롭다, 애송아. 내 유희를 방해할 셈이냐?"
"너한테는 유희일지 몰라도 우리한텐 아니야! 사라져, 당장! 그러지 않으면!"
"그러지 아니하면?"

말끝으로 선뜩 빛나는 푸른 용안이 날아와 박혔다, 쿵! 질량을 띤 적의가 몰아치고 위시의 붉은 머리칼을 흩날렸다. 묵빛 투구 아래서 턱을 들어 올리는 흑기사의 얼굴이 오싹하니 웃고 있었다. 그러지 아니하면, 하고. 거듭 되뇌는 짐짓 유쾌한 목소리 사이로 짐승의 포효가 섞여 흘러나왔다.

"어린 주제에 맹랑하구나! 아서 녀석의 딸년 치고는 걸물이야!"

조롱하며 다가드는 서슬마다 흑기사는 마력을 먹어치운다.

"헌데, 이를 어쩌나! 나는 대드는 것들은 남김없이 찢어 죽이는 체질이라!"

나는 물론이거니와 위시조차 달할 수 없는 억겁의 신비가 우리에게 향하고,

숨조차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위시의 어여쁜 눈매가 꼭 감겼다가 이편을 향했다. 내 잘난 것 없는 얼굴을 바라보는 내 어린 용은 눈부시게 웃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날 믿어.

속삭이는 목소리에 겨워 그 아이는 마침내 날개를 펼쳐 나를 놓아주었다. 손을 끌어올리고 온 마력을 일점에 불어넣었다. 추진력을 얻은 롱기누스의 창은 넓은 평원 모든 산소를 휘감아 불사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위시가 자아낼 수 있는 최강의 신비가 손을 벗어났다. 기적을 바라고 대기를 꿰뚫어 날았다. 폭발했다.

콰아앙!

귀청을 후려치는 폭음에 걸쳐 목표한 일점은 증발했다. 녹아버릴 듯한 열기에 겹쳐 불꽃이 하늘 끝까지 치솟고 산소를 먹어치워 팔을 뻗었다. 지옥보다 더 지옥같은 그 유황불 한가운데로부터 흑기사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와 귓가를 파고들었다.

"허! 어린 나이 치고는 제법 쓸 만한 재주를 지녔으나――,"

말이 맺기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쾅! 두 번째 창을 내던진 위시는 그 착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내 이름을 불러,

"한가람, 뛰어!"

그 맑은 목소리, 단 한 마디를 신호로 나는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루시아가 다쳐 누운 곳까지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멀지 않았다. 쾅! 콰앙! 연달아 귀청을 후려치는 폭음과 뺨을 달구는 열기를 뚫어 몇 걸음을 뛰자마자 곧장, 내 눈길 끝에는 루시아가 들었다. 조금만 더. 되뇌며 뛰는 걸음마다 폐가 다 타들어가도록 숨이 벅차오르는데 점차로 등을 타고 오르는 오싹한 공포가 겹쳤다. 쓰러져 누운 루시아의 여신 같은 지체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지러진 흉갑 안으로 어디가 부러지고 어디가 찢어졌는지 모르도록 온통, 루시아,

"루시아! 정신 차려! 루시아!"

다다라 그 작은 어깨를 안고 외치는데도 내 공주는 대답지 않았다. 눈을 뜨지 않았다. 루시아. 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로 그 사람은 끊길 듯 가는 숨만을 몰아쉬고 있었다. 깨진 갑옷 틈으로 피가 새고 어긋난 방향으로 꺾여 부러진 왼 다리가 축 늘어져, 도무지――,

이게 뭐야, 루시아. 나 없는 사이에 이렇게 되는 게 어디 있어. 떠는 입술서 대답 없는 물음을 지어내면서도 내 심장은 겁과 설움에 젖어 뛰었다. 그새 적막이 내렸다. 열기도 폭격도 온 전장서 귀청을 울리던 폭음도 모두 멎어 있었다.

섬칫 고개를 든 나는 오싹한 소름에 숨을 삼켰다. 위시, 그러고보니 위시는,

목이 어긋나도록 급히 돌아본 주위서는 위시가 쏟아낸 모든 마법이 지워져 있었다. 뒤편, 멀지 않은 곳이 흑기사가 서 있었다. 나로선 감히 우러르기도 어려운 마지막 서클, 압도적인 신비의 폭격을 가볍게 지워버리고 우뚝 기립하여 위시의 하얀 목을 휘어잡은 채로. 소녀의 여린 지체를 들어올린 흑기사의 면갑 안으로부터는 크게 웃는 소리가 났다.

"안타깝다! 분발하였으나 차마 내게 이르지 못한즉!"

목을 잡힌 위시는 아미를 고통으로 찌푸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당차던 목소리 한 마디 뱉지 못하고, 묵빛 건틀릿이 목을 부러뜨리려 죄어들 때마다 소리 없는 비명을 뱉으며 바둥거리는 내 어린 용은 오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편을 바라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 가득히 눈물을 머금어 떨구고 있었다. 힘을 다해 연 소녀의 입술이 간신히 입모양만으로 속삭였다. 도망쳐, 가람아, 도망쳐――

점차로 하얀 살갗을 파고드는 건틀릿에 위시의 고운 눈매가 체념처럼 감겼다. 힘들여 쉬던 그 아이의 숨마저 멎어갔다. 하늘이 무너졌다. 산산히 부서진 시퍼런 절망의 조각들을 헤쳐 나는 홀린 듯 몸을 일으켰다. 분노가 뒤늦게 몸을 덮치고 내 온 감각을 사로잡았다. 루시아가 놓쳐 땅에 구르던 적법절차의 검을 틀어쥐고,

저 자에게 목을 부여잡힌 내 어린 용과 쓰러져 피 흘리는 공주께옵선 내가 선 무채색의 현실을 온통 찬연하게 물들이는 나의 꿈, 나의 사랑. 이가 부서져 갈리도록 악물고도 거친 숨이 가라앉질 않았다. 분에 벅찬 심장이 온 천지를 울리도록 박동하여 쿵, 쿵, 쿵,

쿵!

"일찍이 내가 태어날 때 신탁이 있었지!"

내뱉는 흑기사의 어조는 자못 유쾌하다.

"이 별에서 태어난 그 무엇도, 어떤 마수도 나를 죽이지 못하리라고!"

천년을 살았다는 짐승의 말마다는 역한 냄새가 밴다.

내가 이룰 수 있는 기적 전부를 불어넣고 겨누어 드리운 검은 찬연한 백색광을 머금었다. 제정권력을 자칭하고, 헌약憲約을 바로세우고, 적법한 절차에 의하여, 벼린지 육천년이 되었다는 손 안 전능의 마구에 마음을 다해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엄한 생명과 신체를 보호할 힘과 용기를 빌어서. 감히 저 위대한 적법절차의 검을 휘어잡은 나는 내가 발 딛은 현실에 꿈을 바랐다. 몰아쳐 걸으며 내 앞에 선 악한 용에 이빨을 드러냈다.

설핏 이편을 돌아보는 흑기사의 눈이 잠시 놀랐다가 이내 담뿍 비웃음을 밴다. 감히 인간 따위가 무얼 어이 하려고――, 이죽거리는 저 용의 푸른 눈은 용안[龍眼], 적의를 담아 향하면 눈길을 받는 자가 주체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인다는 전능의 눈이다. 다만,

다만 나는 용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 어린 용에게 소환되어 이 세계에 오고 그 정 많은 녀석과 백여든 날을 다닌 내게는 용안이 들지 않는다. 들 리가 없다. 눈빛 하나로 나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그 오만을 꿰뚫어 일섬. 그의 양손검을 밟고 뛰쳐오른 내 손끝서 시퍼렇게 날 오른 적법절차의 검이 벼락쳤다. 몇 겹 방호진을 둘러친 두터운 갑옷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고 천 년의 신비가 쌓여 있을 용심[Dragon Heart] 한가운데로, 있는 힘껏,

쿠웅!

그리고 용이 찔렸다.

칼자루를 쥔 내 손으로는 거친 고동과 경련이 옮고, 흑기사의 용안이 부릅떠 이윽고 떨기 시작했다. 그의 건틀릿은 이윽고 위시를 놓쳤다. 땅에 구른 붉은 머리칼 어린 소녀는 비로소 트인 숨으로 콜록, 밭은기침을 뱉는데, 흑기사의 숨은 되려 점차로 멎어가고 있었다. 칼날을 타고 흐르는 용의 피가 뜨겁게 내 손을 적시며 그 자, 천 년 묵은 원시룡의 무릎이 꺾이고 쌓였던 억겁의 세월이 차츰 무너져 갔다.

시퍼렇게 질려 나를 마주하는 짐승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신탁만 믿고 영영 살아서 미쳐 날뛰리라 자신했겠지만,"

이어 칼을 휘어잡아 그것의 심장을 짖찢는 나는 터질 듯한 숨을 억눌러 속삭인다.

"나는 이 별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침묵 속에 이윽고 사시나무처럼 떠는 용언이 울려퍼졌다. 그 신탁이 그런 뜻이었단 말이냐. 통곡으로 되뇐 흑기사의 용안이 경악과 공포로 탈색해 있었다. 힘껏, 그것의 흉갑을 걷어차 칼날을 뽑아내자 거구는 점차 기울고 쓰러졌다. 사람으로 둔갑하는 데 쓰였던 마력이 통제를 벗어나며 짐승은 본래의 거대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이내 단말마의 비명을 치기 시작했다. 온 전장 지천을 울리도록.

쓰러졌던 위시를 부축해 앉혔다. 비로소 기침을 멎고 고른 숨을 쉬기 시작한 내 어린 용을 끌어안아 그 아이가 아직 내 현실에 살아있음을 확인하였다. 멈칫 나를 올려본 소녀는 이윽고 젖은 눈을 감추어 내 품에 얼굴을 묻고 뺨을 부볐다. 내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여 곱게 곱게 흐느꼈다. 울음이 내게로 옮아 나마저 위시의 날씬한 어깨, 붉은 머리칼에 기대 짠 것을 참고 삼켰다. 귓가로 들리는 위시의 젖은 숨과 박동이 가슴 벅차도록 정에 겨운지라,

이내 무릎에 뉘인 루시아에게 생기와 활력의 주문을 외고 점차 아무는 상처들을 어루만지는데, 와중 코끝에 차가운 것이 묻었다. 올려본 잿빛 하늘서 꿈결 같은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덧글

  • 가람온 2010/07/08 00:38 # 답글

    단 세 번의 포스팅으로...
    순수하게 감탄했습니다.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 kidovelist 2010/07/08 21:23 #

    과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푸른매 2010/07/08 00:42 # 답글

    그러니까 언명은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마술사왕 ㅋ
  • kidovelist 2010/07/08 21:26 #

    말씀하신 톨킨의 반지의 제왕부터 셰익스피어의 멕베스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매우 전형적인 사망 플래그죠. 그러게 왜 악역들은 쓰잘데기 없는 말을 줄줄이 뱉어서!
  • 바시 2010/07/09 14:50 #

    교훈 : 비밀을 떠벌리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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