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발 딛은 지금 이곳, 다시 그대에게; Epilogue 소설



긴 밤이 멎었다. 다시 동이 텄다.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는 어둠을 몰아내고 온 거리를 찬연하니 불밝혔다. 햇살과 신 새벽 별빛들이 궁 드높은 담을 넘고 숨어들어, 땅 위 발 딛은 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분의 뺨에 아롱져 맺히는 와중――, 눈꺼풀 너머까지 스며드는 빛에 잠든 공주께옵선 지친 몸을 뒤척이셨다. 설핏 긴 속눈썹을 든 쪽빛 눈이 이편으로 향하고, 이어 멍하니 나를 바랐다.

가람.

언제나 그렇듯이 직책을 빼고 성마저 제하여 다만 이름으로. 귀를 간질이는 그 고운 목소리에 나는 얼른 환히 웃어 보였다. 네, 루시아. 나 여기 있어요.

들리지 않은 걸까. 루시아는 멈칫, 무슨 말인가를 뱉으려다가 꼭 입술을 다물었다. 그 사람이 몸을 일으켜 무릎으로 앉고 있었다. 이불이 흘러내려 맵시있는 몸이 드러나고 와중 얇은 옷감 안으로는 희고 고운 맨살이 비치는데, 가람, 다시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른 소녀는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쌌다. 촉감과 체온이 점차로 옮고, 서로 와 닿는 실감에 이윽고 루시아는 울먹 눈을 찌푸렸다.

"또,"

입술을 여신 공주께옵선 침상에 손을 짚은 채로 폭 고개를 숙이셨다.

"또 내 목숨을 구했군요. 그 괴물에 맞서기까지 해서."
"위시가 도와준 걸요."
"한국으로 돌아갈 소중한 기회까지 미뤄두고."
"말했잖아요, 루시아. 나 안 떠날 거라고요."
"후회할지도 몰라요."

저어해 속삭인 루시아는 이윽고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가람이 후회하고 나를 원망하게 될지 모르지만, 나, 노력해 볼게요. 가람이 이곳에 남은 걸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게끔 해 줄게요.

착하게도 다짐하기를 마친 내 공주께서는 이내 설핏 푸른 눈을 들었다. 이편을 바라 보석같은 눈동자 가득히 나를 담았다. 젖은 눈이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기색으로, 미안과 기쁨에 함뿍 겨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가람. 부르며 이편으로 다가앉는 서슬에 그 사람이 홑겹 얇은 셔츠 위로 매고 있던 내 교복 넥타이가 흔들렸다. 정표로 가져갔던 그 보잘 것 없는 띠가 여신같은 지체 봉긋이 부푼 가슴을 따라 내린 중, 소녀는 설움 가신 고운 얼굴로 나를 우러러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때로 꿈은 현실보다 훨씬 매력적이노라고, 당신은 그리 말했지요."

진정으로 그런가 봐요. 가람, 당신은 나의 꿈. 나의 희망. 내가 발 딛은 땅에 내린 저 하늘 가장 밝은 샛별. 다시 돌아와 주신 내 공왕께 내가 무엇을 드려야 할까요. 노래하신 공주께옵선 내 어깨에 손을 얹어 이편으로 기대왔다. 미소 띤 벽안을 짐짓 장난스레 가늘게 떠 나를 바라보고,

"돌아온 걸 환영해요, 가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루시아. 되뇌는 나의 목을 끌어안고 소녀는 내게 안겼다. 부드러운 지체를 내 품에 묻었다. 향그러운 아카시아 내음이 뺨에 닿은 금빛 머리칼서 옮아 숨결마다 배는데, 어깨에 기대어 잘근 내 귓불을 깨문 그 사람에게서 푸르게 젖은 속삭임이 흘러든다. 일러 말씀하시기를, 나 두 번은 선뜻 못 보내주니까 그리 알아요――,

다음에 또 가려고 들면 잡겠다는 말일까. 정에 겨운 그 말을 따라 내 뺨으로 루시아의 입술이 닿았다. 어제 헤어질 때 석별의 정으로 주었던 입맞춤을 되돌려 받으시려는 듯 아직 향기 남았던 그 자리에. 옮아오는 체온으로 가슴이 들뜬다. 루시아. 입을 열어 부르는 그 사람의 이름이 소리 낸 나마저 낯설도록 달콤하게 흘러나오고, 살폿 미소한 어여쁜 공주는 혀끝을 내밀어 내 뺨을 핥았다. 차츰, 내게로 무너져 폭 안기고 마는 세버들 같은 허리에 손을 두르고 소녀의 지체를 고이 품어 안는데,

"당장 그거 안 떼놓으면 지금이라도 끌고 가버릴 줄 알아."

귀를 간질이는 뾰루퉁한 목소리.

위시 경!? 화들짝 놀라 소리친 루시아는 내 품에서 도망쳐 버렸다. 주저앉은 공주의 민망해 달아오른 얼굴이 향한 저 편으로, 붉은 머리칼 아름다운 소녀가 서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그 어린 용은 한껏 토라져 입을 비죽 내밀고 있었다. 나를 흘겨보는 눈초리를 따라 장밋빛 입술이 타박하는 말을 종알거렸다. 하여튼 한가람 너, 미워 죽겠어――,

"대뜸 들어와서 한단 말이 겨우 그거야?"
"몰라, 하여튼 미우니까 그렇게 알아."
"공주의 침실에 함부로 들락거리지 마시지요, 경!"
"누군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오는 줄 알아!?"

맞서 발칵 소리지른 위시는 손가락으로 대뜸 나를 가리켰다.

"이거! 내 거에 자꾸 네가 집적거리니까 이러는 거잖아!"

위시 경의 것? 놀라 되뇐 루시아는 멈칫 이편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가늘어진 푸른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설명하세요 공왕, 하고. 나지막이 추궁하는 공주께 나도 당황하고 만다. 아니오, 루시아, 그러니까 이건,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의 곡해가――,

"뭐야, 틀려?"

아니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기세로 나를 훔쳐보는 위시의 눈에 나는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나마저 울고 싶어졌다. 밉기는 되려 내가 미울 일인데. 잠시 고운 아미를 찌푸린 채로 이편을 보던 루시아는 이내 무엇을 떠올렸는지 설핏, 체셔고양이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몸을 일으켰다. 여신 같은 지체가 하얀 맨발로 울연하고도 그윽하고, 안존하면서도 한가로웁게 이편으로 다가와,

"그렇군요. 하면 서둘러 비교우위를 차지해야겠지요?"

위시를 돌아보아 의기양양한 목소리를 던지고는 단숨에 나를 밀쳐냈다.

넘어져 카펫에 누워버린 즉시, 놀라 소리칠 틈도 없이 아름다운 쪽빛 눈이 다가왔다. 공주께서는 모로 누운 내 위로 서슴없이 올라 긴 금발을 드리우셨다. 엎드려 서로의 숨결이 닿도록 가까이 내린 옥안이 빨갛게 달아올라 웃음 짓고 있었다. 장밋빛 입술이 내 입술에 포갰다. 서둘러, 한없이 깊고 달콤하게 입맞춤이 이어졌다.

하얗게 질려 입을 빠끔거리는 위시를 외면하고, 루시아! 외치려다가 숨이 멎도록 놀라 자기를 밀어내려는 나마저 꼭 누른 채 살폿 입술을 땐 그 사람은 달뜬 옥음으로 내 이름을 속삭였다. 구애하듯 거듭하여, 가람, 가람, 가람. 그리고 다시 깊게 입맞추는 공주께옵선 홑겹 옷감 안 보드라운 살결을 내 몸에 포개 안기셨다. 그렇게 아름다운 꿈을 현실로 만드시옵고,

"웃기, 웃기지 마! 그거 내 거야! 내놔! 얼른!"

발칵 소리친 위시가 나를 잡아챈다. 잡아챈 그대로 내 가슴을 꼭 죄 안아서, 또 빼앗아 가려고만 해 봐라, 운운. 완전히 임전태세를 갖춘 내 어린 용은 눈에 힘을 주고 꾹 저편을 노려보고 있다. 와중 떨어져 주저앉고 만 루시아는 맑은 웃음소리를 자아냈다.

"미안해요."

속삭여 사과하는 그 사람의 웃음기 밴 쪽빛 눈이 아름다운데, 그 사람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가는 팔을 펼쳐 얼른 나와 위시를 끌어안았다. 백일간을 함께 다니고 힘겨울 때마다 서로 의지하시던 어린 용을 다시 품에 품으셨다. 귓가로 속삭이시는 즉슨, 미안해요, 위시 경, 그리고 고마워요, 나를 구해주고 이 사람을 영영 빼앗아가지 않아 주어서.

위시는 대답지 않았다. 비죽 입을 내밀어 토라진 표정을 짓는 그 수줍음 많은 소녀는 다만 못마땅한 듯 안긴 어깨를 옹송그렸다. 얼른 떨어지라고 종알거리며, 머뭇머뭇 이편을 훔쳐보는 품새가 귀엽고도 착하다,

하늘은 높고 섧게 내리던 눈도 이윽고 그친다. 내가 발 딛은 지금 이곳은 마법과 용, 전설과 낭만, 사랑과 기적이 남은 곳. 철학자 앙리 루이 베르그송은 일러 말하기를――,

그리고 다시 한 달, 내 세계로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문이 열렸다.

위시의 마력과 루시아의 기술, 왕국의 창고에 육십 세기를 묵던 막대한 마구들을 동원하여 내 어린 여신들은 마법을 빚어내었다. 어느 쪽 현실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기적을 내게 선물했다.

돌아온 나는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에게 이제껏 나를 도와주고 내 곁에 있어준,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소개했다. 공부를 다시 손에 잡고 이듬해 대학에 합격했다. 내 현실을 직접, 보다 눈부신 색으로 칠해 나가기 위한 붓을 거머쥐어 붓털 한소끔 꿈을 적셨다.

이제 봄이 돌아왔다. 도서관으로부터 교양관까지 이르는 좁은 숲길과 언덕 꽃길은 눈길 닿는 곳마다 봄빛이 찬연하다. 첫 등교, 첫 수업을 함께 치른 위시는 내 팔에 매달려 달떠 종알거리고 있었다. 내 어린 용은 한 세기를 외로이 지내다가 이제야 점차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에 익숙해지는 양. 벌써 온 선배와 동기들의 귀염을 독차지한 그 소녀는 종종걸음으로 나를 따라 걸으며 어느 꽃송인가를 꺾어 품에 안고 있었다. 코를 묻고 향기를 맡다가 문득 자길 향한 내 눈길을 알아채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하고 쏘아붙이며 그 아이는 고운 눈을 감아 웃어버렸다.

다음 강의는 "현대사회와 인권," 시작이 채 5분도 남지 않은 와중 들어가야 할 교양관 어느 강의실 문 너머에서는 낯익은 하이얀 아카시아 향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쩌다가 먼지 자욱한 강의실 안에 그 예쁜 꽃이 핀 걸까. 뒤늦게 멈칫 숨을 삼킨 위시는 이내 아미를 찌푸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게 어딨담 운운. 이제야 누구인지 알 듯도 싶었다, 어쩐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문을 열자, 흰 블라우스에 푸른 리본을 맨 봄옷 차림의 먼 나라 공주께서 거기 계시었다. 강의실에 있는 다른 모든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은 채 그들 웅성거리는 소리에 시치미를 떼고, 햇살 같은 금빛 머리칼을 드리우고 긴 속눈썹 아래로 눈을 감추어, 앙큼하게도 기품 넘치게 앉아서. 내가 온 것을 알아챘을 텐데도 모른 척 눈길을 책에 둔 그 사람에게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루시아."

비로소 아름다운 푸른 눈이 이편으로 향했다. 책을 덮고 일어서 새초롬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공왕. 부러 짐짓 내 직책으로 나를 부른 그 사람은 다가오는 나의 어깨를 안아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뒤에서 놀라 아우성치는 사람들 중에는 내 동기와 선배들이 섞여 있는데 공연히도. 이윽고 내 품에서 벗어나 나와 눈을 맞춘 루시아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나를 우러렀다. 속삭였다.

"감히 당신의 현실에 발 딛은 나를, 공왕, 환영해 주겠나요?"

그럼요, 루시아. 웃으며 허리를 숙인 나는 잿빛 현실을 찬연하게 물들이는 꿈의 공주께 입술을 포갰다. 자리를 박차고 죽일 듯이 일어서 아우성치는 온 선배들과 동기들을 관심 밖으로 밀어낸 채 나의 사랑과 기적을 차지했다. 날씬한 허리를 채 안고 몸을 기울여 활처럼 휜 지체를 품자 달뜬 심장의 고동이 이편까지 전해졌다. 블라우스 아래 감추온 부드러운 살결과 하얗게 내려앉는 아카시아 향기까지 오롯이. 이내 촉촉이 젖어 떨어진 입술을 꿈결처럼 만진 그 사람은, 하늘같은 벽안 가득히 어여쁜 웃음을 띠고 나를 포옹했다.  

"저 뒤에 두 사람은, 교환학생들입니까?"

막 강의실에 들어온 젊은 교수님은 내 양편에 앉은 사람들을 보고 그렇게 물으셨다. 방금 위시가 꼬집어 빨개진 귀를 얼른 가리고, 네, 교수님, 얼른 그렇게 대답하자 교수님께서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셨다.

"어찌 되었든, 강의 시작합시다. 첫 시간이니까 몇 마디만 하고,"

그리고 분필을 든 그 분께서는 단숨에 칠판을 긁어내리셨다.

"현실에서 모든 이의 인권이 오롯이 보전되지 못함은 우리 보는 바와 같으며,"

뾰루퉁 토라져 제 긴 머리칼을 꼬고 있던 위시도, 모른 척 웃고만 있던 루시아도 그 아름다운 눈들을 들어 교수님의 힘찬 손이 자아내는 문구를 좇았다. 숨 막힌 탄성을 터뜨렸다. 어쩐지 낯익은 밀어가 마법처럼 아로새겨지고,

"그 완전한 조화를 이룰 방법이 꿈같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러나"

분필을 내린 교수님께서는 이윽고 칠판에 적힌 문구를 가리켜 목소리를 높이신다. 무한한 가능성을 잉태한 미래에의 관념이, 미래 그 자체보다도 중요한 것으로서, 소유보다도 희망에, 현실보다도 꿈에 한층 더 많은 매력이 발견되노라고, 철학자 앙리 루이 베르그송은 일러 말하였으므로,

"이에 여러분은, 아름다운 꿈을 품어 온 지성과 야성을 다해 치열하게 사랑하기를 바라며,"

이로서 새로이 학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교수님께서는 칠판에 분필을 던져 산산이 깨셨다. 딱! 하는 그 파열음과 함께 온 수강생들이 일어나 환호했다. 박수를 쳤다. 위시는 얼른 내 귀를 잡아당겨 제 작은 키와 눈높이를 맞추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 어깨에 묻어 나를 안는다. 루시아는 미소하여 내 뺨에 입술을 포개고 내 이름을 부른다. 달콤하옵게, 가람.

내가 발 딛은 지금 이곳, 다시 그대에게,




주석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이러한 소설, 이른바 이세계 고교생 깽판소설을 쓰기가 부담이 적다. 진작 입시공부와 수능을 마친지라 적어도 "공부에 척을 진 멍청한 고등학생이 수능 보기 싫어서 자위하려고 쓴 글" 운운하는 비난으로부터는 자유롭다. 주인공 된 한가람과는 수능 때 죽 쑨 과목도 다르고 재수 경험의 유무도 갈리니만큼 더욱이. 물론 아예 새로 쓴 소설은 아니다. 원작이 있다. 아직 내가 고등학생이던 2007년 경 쓴 것을 통째로 들어엎어 세 해만에 고쳐 썼다마는, 채 세 해만에 내 글이 이토록 변했을 줄은 나도 정말 몰랐다.

그래도 글은 여전히 내 글이다. 기획을 자아내며 만년필을 휘갈긴 손과 한 달 가까이 키보드를 두드린 손이 모두 내 것이기에, 쓰는 소설마다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점들은 이번 글에도 극명하다. 위시, 소녀, 녀석, 내 어린 용, 붉은 머리칼이 아름다운 소녀 등등으로 문장마다 정신없이 주어를 돌려막는 수법은 아직도 벗어나질 못했다. 자칫하면 해당 서술이 어느 인물을 가리키는지 헷갈리기 십상인 이 기법은, 그러나 긴 문단 내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짜내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되는 악습이다.

주인공 가운데 어느 한 명도 슬프지 않도록 "완벽한" 억지 결말을 만들어내는 기획도 여전하여, 결국 한가람은 공주님과 귀여운 드래곤 가운데 누구 하나도 택하지 못하고 어정쩡 남아버렸다. 이건 더 근본적인 문제다. 글을 붙잡고 있다 보면 주인공들이 전부 내 아들딸처럼 생각된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마냥, 어느 한 쪽에 실연의 아픔을 겪게 하는 것이 가슴 시린 것이다. 거기서 "그렇다면 둘 다" 따위를 떠올리는 나란 자는, 아예 정신이 나간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래도 한 달을 공들여 쓴 글이다. 달리 내 할 일을 충실히 하면서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새삼 깨달았다. 각 화에 곁들인 그림은 언제나 그렇듯 내 착한 여동생이 그렸다. 글을 다 쓰곤 녀석에게 보여 삽화 세 장을 받기까지 깨나 어르고 달랬다마는. 이번 에필로그는 원래는 삽화가 없을 예정이었지만 전에 받아놓고 못 쓴 그림이 있어 삽입했다. 컨셉은, "가람이를 내놔! 내놓으란 말이야!" 여기까지 꼭 네 장의 삽화를 그려준 동생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하며, 여기저기서 인용한 표현과 문장들을 이에 덧붙인다.

첫 화. 전투에 등장했던 리베르타스 대대, 유스티티아 대대, 베리타스 중장보병대는 내 학교의 교훈인 "자유," "정의," "진리"를 각각 라틴어로 읽은 것이다. 전투 끝에 난 아군 사상자 2,300명과 적군 사상자 4,900명은 워털루 전투에서의 연합군 피해 23,000과 프랑스군 피해 49,000을 각각 10으로 나눈 수이다. 루시아의 이름인 루시아 아스그나스 가운데 아스그나스는 창세기에 나오는 야벳의 손자이자 고멜의 아들 아스그나스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가람의 마지막 독백,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는 박두진 시인의 "해"에서 그 표현을 빌었다.

두 번째 화. 적법절차의 검[Sword of Dueprocess]에서 적법절차[Dueprocess]는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14조 제1절의 한 대목, "nor shall any State deprive any person of life, liberty, or property, without due process of law;"로부터 따왔다. 루시아가 영창한 검리, "나와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해, 즉시, 확실하게, 그리고 종국적으로"라는 주문은 교과서 및 판례로 확인된 한국 형법상 정당방위의 법리를 참조하였다. "수백 수천 수억 마디의 말"은 친애하는 홍진호 선수의 명대사를 패러디한 것이다.

세 번째 화. 그룬트레히트 근위대대는 헌법상 기본권의 독일어명 grundrecht를 땄다. 한가람이 외던, 기술함수니 등효율선이니 운운하는 영창은 미시경제학에 등장하는 생산자이론의 몇 어휘들을 사용했다. 롱기누스의 창은 유명한 성물의 이름을 그대로 빌렸으며,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게 담기고 흘러... 밀려온 악의에 어린 날개를 적신 공주"는 시인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에서 빈 것이다. 신탁을 믿고 무적인 줄만 믿었다가 쓰러진 원시룡의 최후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맥베스를 오마주하였다.

그리하여 에필로그도 끝났다. 마지막으로, "그래서 가람인 둘 중에 누구랑 이어졌어?"하고 물었다가 "둘 다"라는 내 대답에 식겁, "둘이 합체라도 했어?" 하고 눈이 휘둥그레져 되물은 내 동생에게 용서를 빌며, 짧고도 길었던 글을 맺는다. 마침내.


덧글

  • 르-미르 2010/07/10 23:21 # 답글

    멋진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끝을 맺은걸 기념하여(!) 다시 한번 정주행 하였네요.
  • kidovelist 2010/07/11 00:37 #

    좋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다시 읽으시며 지겹지 않고 즐거우셨길 바랍니다.
  • 바시 2010/07/15 19:05 # 답글

    이젠 현실 하렘이군요. 이고깽이 현실세계에서 하렘 형성하는 것 처음 봐요.

    +링크해도 될 까요.
  • kidovelist 2010/07/15 19:46 #

    링크는 언제나 반기고 있습니다. 해 주시면 저로선 기쁠 따름입니다. 헌대, 이고깽이 현실세계에서 하렘 만드는 게 드문가요? 몰랐어요, 그랬었나? 이게 전부 가람이 탓입니다. 가람이를 탓합시다.
  • 휴지마리 2015/05/16 11:41 # 답글

    꿀잼이네요. 이런 거 무척 좋아합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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