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워치 : D.va의 게임 / 4 소설



전편


동트는 섬광이 바다를 불밝혔다.

수평선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작렬하는 그 백열의 빛 앞에 세계가 비현실적인 흑백의 그림자로 뒤덮였다.

소리가 빛을 따라잡기까지 시간이 잠시 멈추고, 다시 가속했다.

바다가 일어나고 있었다. 폭발이었다. 충격파가 빛을 뒤쫓아 거대한 동심원을 그리며 달리고 있었다. 폭풍이 오고 있었다. 나와, 송하나에게로.

“송하나!”

밀어닥치는 폭풍 앞에서, 나는 조종석을 박차고 나왔다.

넋을 놓고 빛을 보고 있던 송하나의 팔을 잡았다. 무겁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 작은 소녀를 조종석으로 거칠게 끌어올렸다. 소스라친 소녀에게서 “꺄아…!?” 하는 작은 비명소리가 났지만, 듣지 않았다. 그대로 소녀를 조종석에 밀어붙인 나는 캐노피를 폐쇄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어느새 나보다 작아진 소녀를, 나는 내 몸으로 덮었다.

충격파가 바로 육지를 덮쳤다.

쿠 우 우 우 우 — !

“크욱—!”

공성MEKA의 육중한 동체가 너무도 간단히 퉁겨나갔다. 뒤집혀 구르는 MEKA 안에서 몸이 장난감처럼 퉁겼다. 굉음에 귀가 멀고, 부딪힐 때마다 몸이 찢기고 깨지는 격통이 달렸다.

망가져버릴 것만 같은 아픔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나는 온몸으로 송하나를 감쌌다. 힘주어 끌어안은 소녀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뒤집힌 MEKA에서 보이는 기울어진 수평선에서, 섬광이 꺼져갔다.

우리 기지가 저기 빛 속에 있었다.
일대 모든 대기를 집어삼키며 불타오르는 저 그라운드 제로가, 우리 기지였었다.

부산해상기지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수없이 많은 MEKA가, 함선이, 내가 알던 사람들이 저기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이름을, 목소리를 지금도 하나하나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 모두가 사라졌다. 수평선에서 빛이 꺼지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불과, 재와, 죽음의 냄새뿐.

공포. 공포. 토할 듯한 공포를 삼키며, 나는 송하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언제나보다도 작아진 그 소녀가 내 품 안에서 떨고 있었다.

소녀의 눈은 폭발에 사로잡혀 있었다. 눈이 타버릴 듯한 그 빛에 눈물이 맺혀서도 눈 감지 못하고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 백열광 속에서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며, 송하나는 자그만 손으로 입을 막고 비명을 참고 있었다. 멀었던 귀가 돌아오면서 그 녀석이 고장난 기계처럼 되풀이하는 말이 들렸다.

“…닉…, 옴닉…, 옴닉…,”

송하나의 시선을 따라 눈을 들자, 푸른 바다 위로 서릿발 같은 백색의 궤적들이 선을 그리고 있었다.

수백 수천 수억 개의 항적들이 바다를 가르며 해일처럼 밀어닥치고 있었다. 그 미지의 궤적들은 공포에 다름아니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공포는 확인되고, 절망으로 실현됐다.

바다를 가득 매우고 부산으로 밀려오는 것은 옴닉 절단로봇,
옴닉 섬멸로봇,
옴닉 폭탄로봇, 옴닉 돌격병, 옴닉, OR14,
그리고 옴닉, 옴닉옴닉옴닉 옴닉옴닉 옴닉,옴닉옴닉옴닉옴닉옴닉옴닉옴닉옴닉옴닉옴닉옴닉.

콰아아—!

그 모든 항적들의 중심에서, 바다를 뚫고 강철로 된 섬이 솟아올랐다.

움직이는 섬 아래에는 기둥 같은 거대한 다리가 달려 있었다. 수심을 가볍게 초월한 거대한 다리로, 그 사족보행의 괴물은 바다를 걷고 있었다.

“저게, 뭐야.”

쿵 소리를 내며. 쿵 쿵 소리를 내며.[1] 네 발로 직접 해저의 지각을 밟고 지축을 울리며 신화처럼 바다를 가르는 그 괴수는, 가능성으로만 추정되던 초 타이탄 급 옴닉임에 분명.

“…왜,”

왜, 저게, 지금 와.

“아니. 구라치지 마 옴닉시발들아.[2] 아니랬다고. 그 새끼들이, 아직 아니랬다고!”

아직 아니라고 했다. 청와대가, 국방부가, 육본이 몇 번이고 보증했다. 시간은 충분히 있다고. 옴닉은 일정한 패턴에 따라 공격하고 다음 옴닉사태까지는 최소 9개월은 남았다고. 그러니까 나에게도, 송하나에게도, 기지 사람들에게도 오늘은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다. 오늘은 아니었다. 아니어야 했다.

그러니까, 송하나, 제발 말 좀 해봐. 이건 아니라고. 이건, 뭔가 잘못된 거라고!

“…아니, 나만 들은 거 아니잖아. 국방부에서 그 새끼들이 브리핑 할 때! 송하나 너도 옆에서 같이 들었잖아! 유인 메카는 아직 시험단계고! 옴닉의 패턴에 따르면! 아직 시간이 있다고—!”

대답하지 않는 소녀를 붙들고 흔들며 고함쳤다. 공포가, 경악이, 의문이, 불합리한 분노가 되어 터져나왔다. 그런데도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인 소녀가 이상해서 참을 수 없었다.

“…속인, 거야.”
“속여!? 누가! 국방부 새끼들이 하다하다 우리까지!? 아니면—!”

그러다가 섬칫, 입을 다문다.

“설마,”

이제야, 이해했다.
우리 모두가, 옴닉에게 속은 것이다.

일정 주기로만 공격하던 옴닉의 패턴은 기만이었다. 지금까지 막아냈던 옴닉은 힘을 숨긴 것이었다. 이 기습, 바로 이 기습을 위해서 옴닉이라는 이름의 저 기계장치의 신은 무려 이십 년을 인간에게 자신의 거짓 패턴을 확신시키며 거대한 설계를 해 온 것이다.

그래서 무인MEKA들이 통제를 잃고 우리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통신을 걸어도 기지에서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옴닉이라는 이름의 기계장치의 신은 우리의 모든 전자기기를 해킹하고 모든 네트워크를 마비시키고 무인MEKA를 포함한 모든 인공지능무기에 대한 통제권한을 획득해, 우리의 무기로 우리를 친 것이다. 완벽히, 상정을, 초월한, 능력으로.

부산해상기지는 파괴됐다. 모든 무장은 해제됐다. 이제 저 강철의 괴물들과 인구 오백만의 도시 부산 사이에 있는 것은 나와, 송하나, 그리고 우리가 탄 마지막 유인MEKA 1기뿐.

“…하.”

참을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후퇴하자.”
“…후퇴? 어디로?”
“어디? 어디냐고!? 무슨 소리야! 부산 말고 어디가 있어!”

당연히 부산이었다. 부산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걸 왜 물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송하나 너도 분명히 알 거 아냐!

“부산으로 가면 돼! 저기 저 총합 칠백 제곱킬로미터의 빌딩숲! 극동의 스탈린그라드로! 부산으로 끌어들여서 저 빌딩들에 숨어서 싸우면! 그러면 옴닉이 몇 대가 몰려오든 싸울 수 있어! —아니! 가지 않으면—!”

—가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다. 우리가 선 곳은 부산으로부터 옴닉의 파도를 막을 최후의 방파제인 노 맨스 랜드: 무인지대였다. 그러나 이미 싸울 군대도, 수많은 전투순양함들도, 무인MEKA도 없었다. 전부 저기 있던 부산해상기지와 함께 사라졌다.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는 이 콘크리트 황야에서 저 옴닉의 군단에 맞선다면, 죽음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야 했다. 그런데도 가만 고개를 젓는 이 녀석이,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부산. 그러네. 부산을 방패로. 맞아. 아마 호랭이가 정답일 거야.”
“그럼 뭐가—!”
“그치만, 그러면, 부산에 있는 사람들은?”

이쪽을 보는 송하나의 젖은 눈을 보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이 녀석 집이 부산인 것도, 이 녀석의 부모님 모두 아직 부산에 계신 것도. 아니, 하지만, 구하면 된다. 아직 구할 수 있다! 다름아닌 이 녀석의 부모님이다! 당연히 구해드려야 한다!

“그래, 너희 부모님? 모시고 가자. 모시고 가면 돼! 내가 도와줄게! 걱정 마! 너하고 내가 같이 움직이면! 그러면 아저씨 아주머니 다 후방까지 무사히 데려다드릴 수 있어!”
“응. 그러네. 호랭이라면 분명 그래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치만,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누구! 대체 누구! 그래! 다 구해서 가자! 말만 해! 누구!”
“경기장까지 와서 나 응원해주는 중학교 친구들. 나만 보면 항상 힘들지 않냐고 토닥토닥해주시는 이웃집 아주머니. 내가 가면 꼭 아이스크림 하나라도 쥐어주시는 편의점 아저씨. 내가 알거나, 혹은 알지 못하는, 하지만 분명히 저기 있을 오백만 명의 사람들. 그 사람들을, 전쟁에 휘말리게 하는 거야?”
“이…!”

노래하듯 이어가는 소녀의 물음을 듣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도 사람들을 살리고 싶다. 나 자신도, 살고 싶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송하나가 살아줬으면 한다. 그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을, 이 녀석 같은 천재가 아닌 나로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 그러면 어쩌자고.”

내가 원망처럼 토하는 물음에, 송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흘러내린 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눈을 감는 소녀가 내 팔 안에 있는데도 금방이라도 어딘가 닿을 수 없는 데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잿빛 하늘 아래 홀로 눈부시게 빛나는 그 소녀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싫었다.

침묵이 흐른 뒤, 소녀의 그 샛별 같은 눈이 다시 들렸다.

“들려? 이 사이렌소리?”

들린다. 잿빛 폭풍 너머 아스라이 들리는 그 사이렌소리는 분명히 우리 등 뒤의 도시, 부산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부산도 알고 있어. 지금까지 우리가 싸우면서 일으킨 불빛도 소리도 전부, 부산에도 확실히 전해졌어. 옴닉이 아무리 네트워크를 마비시키고 시스템을 해킹해도 눈과 귀를 막을 수는 없어. 이제 곧 이 소식이 온 세상으로 전해질 거야. 곧, 후방의 부대들이 출동할 거야. 그러니까, 몇 분만.”

그러고 나를 밀어낸 소녀는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딱 몇 분만 더 싸우면 돼. 싸울 수 있어.”

소녀의 재주 있는 손이 나 대신 조종간을 쥐고, 공성MEKA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융합포로 땅을 짚고 꺾였던 무릎을 세웠다. 깨지고 부서졌던 관절부에 스파크가 튀고 다시, 부스터의 푸른 날개가 펼쳐진다.

“내가, 여기서 막을 거야.”

지척으로 몰려오는 옴닉의 강철의 대오를 직시하는 소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 나를 돌아보지 않는 그 아름다운 눈을 보고, 숨이 막혔다.

이제야 저 녀석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야, 너, 무슨—,”

이 녀석은, 여기서 죽으려 하고 있었다.

“—너, 송하나, 너 왜 이래. 너도 알잖아. 아무리 너라도 다 구할 수는 없는 거, 알잖아!”
“아니, 다 구할 수 있어. 우리나라는 내가 지킬 거야.”
“야. 내가, 내가 그냥 도망치자는 게 아니잖아. 거기 가서! 가서 지키자고 하는 거잖아!”
“알아. 호랭이가 무슨 말 하는지. 아는데, 그건 못할 것 같아. 내가, 안 될 것 같아.”
“야 송하나 너! 너 왜 이래! 너 이게 무슨 게임 같아!?”
“응. 내가 프로게이머니까, 이것도 게임이야. 게임 아직 안 끝났어. 이 게임도 이길 거야.”
“아니. 아니, 안 돼. 제발. 송하나. 제발, 가자. 우리 이러지 말자. 너, 이러면—,”

—이러면, 너 죽어.

이러지 마. 제발 이런 짓 하지 마. 제발, 나를 버리지 마.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삼키며 그렇게 필사적으로 비는데; 그제야 그 소녀가 나를 돌아보고 웃었다.

“호랭이, 미안. 나, 마지막으로 호랭이 메카 좀 빌릴게.”

환하게 웃어보이는 소녀의 눈부신 미소에, 무심코 숨을 삼킨다. 뭐?

“호랭이는 혼자 돌아가줘. 걸어서도 부산까지는 갈 수 있을 거야. 그 동안은 내가 막을 수 있어. 호랭이가 돌아갈 동안은, 꼭 막아볼게. 진짜, 미안. 나중에, 이 빚은, 꼭 갚을 테니까.”

그 부드러운 말이 비수가 되어 나를 찔렀다.

“가. 호랭이. 어서.”[3]

나는 이를 악문다.

제멋대로다. 그런 잔인한 배려, 필요 없었다. 그 눈부신 빛으로 나를 눈멀게 하고, 그 거대한 인력으로 나를 사로잡은 건 너였다. 너를 등지고 내가 돌아갈 곳 따위 없었다. 너 같은 빛을 보고 나면 다시는 빛 없는 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너를 쫓아서 여기, 전장이라는 불길 속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런 나를, 너라는 빛을 영원히 보지 못할 어둠 속으로 버리겠다고?

“이, 빌어먹을, 애새끼—,”

욕을 씹어뱉는다.

눈을 치뜨자 마주친 송하나의 눈이 소스라쳐 있었다.

“호랭, 이…?”

더듬거리는 그 녀석은 화내는 것도 잊을 만큼 놀란 듯했다. 그럴 만했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이 녀석에게 감히 뱉어본 적 없는 욕이었다. 존경하는 동료 프로게이머이자, 3년간 함께 싸웠던 팀메이트, 오랫동안 사귀었던 소중한 친구,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저 소녀에게, 욕 따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나는 이런 욕을 할 이유가 있었다.

“야. 송하나. 이 중2병 애새끼야. 우리나라를 왜 네가 지켜. 너 하나 없어도 대한민국 잘 돌아가! 너 그렇게 안 해도 우리나라 안 망해! 그런데! 나는!”

나는, 너 없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나 간절히, 간절히 네가 살아있기를 바라는데.

목이 메서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느껴지는, 가슴을 찢는 것만 같은 아픔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너는 알아주지 않는 걸까. 왜, 너는, 이런 나를.

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눈앞의 소녀가 더 이상 어리지만은 않은 것 정도는. 열여섯 살 때부터 계속 곁에서 지켜본 여자아이였다. 한 숙소에 같이 살며 3년 동안 함께 자란 이 천재 프로게이머는 이미 내게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어린애처럼 굴지만 실은 누구보다 올곧고 용기있는 아이라는 것 정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나 동경하던 송하나의 그런 점이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죽을 만큼 싫었다.

네가 조금만 더 비겁했으면 좋았을걸. 다른 열여덟 살짜리 어린애들처럼 조금만 더 용기 없고, 조금만 더 생각 없는 아이였으면 좋았을걸. 평범한 열여덟 살의 철부지 소년인 나처럼, 너도 평범한 열여덟 살의 소녀였으면 좋았을걸.

내가 사랑하는 여자아이가, 영웅이 아니었으면 좋았을걸.

“호랭이, 울어…?”

그 녀석의 놀란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내 눈에서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욱…!?”

소스라친 나는 얼굴을 덮어 눈물을 숨겼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눈 위를 눌러보아도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흐윽…!”

최악이다. 이게 이 녀석과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는데, 이런 추한 모습이나 보여버렸다. 그러면서도 주제에 프로게이머랍시고 머리로는 끊임없이 다른 방법을, 다른 전략을 찾고 있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틀렸다. 무력감을 참지 못하고, 나는 숨죽여 흐느꼈다.

“야, 잠깐, 호랭이가, 왜, 울어…, 울지 마…, 응…?”

“이 바보, 니가, 왜, 울어…,” 하고, 어쩔 바를 모르고 나를 달래는 녀석이야말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마치 친구가 울자 이유도 모르고 따라 우는 어린아이 같은 그 소녀가, 나이보다도 어리게만 보였다. 동갑인데도 함부로 손 댈 수 없도록 귀엽게만.

역시 이 녀석은 아직 이렇게 어린데, 왜 이런 잘못된 시대, 잘못된 곳에 있는 걸까.

그러나 손가락 사이 젖은 눈으로 보이는 이 흐릿한 세계에는 분명히 송하나가 있었다.

잿빛으로 물든 세계에서도 빛바래지 않고 홀로 밝게 빛나는 소녀는 지금 이 순간 부산을, 오백만 명의 사람들을, 나를 지켜주려고 하고 있었다.

몰려오는 옴닉의 대물량 앞에서도 결코 겁먹지 않는 눈부신 모습도, 지금 나를 따라 울려고 하는 어린아이같은 모습도, 전부 어쩔 수 없는 송하나였다. 그 전부가,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내가 사랑하던 소녀는 내가 아는 그 모습 그대로 눈앞에 있었다. 내가 등질 수 없는 찬란한 빛은, 아직 살아 있었다.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나는 다만 깊이 젖은 숨을 토했다.

틀렸다. 무리다.

“그래. 싸우자.”

더는 나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역시 나는, 저 빛을 떠날 수 없었다.

“…뭐라고?”
“싸우자고. 같이.”
“뭐? 아니, 야, 이시백, 니가 왜—!”

그제야 겨우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비명처럼 숨을 삼키는 그 녀석에게 지지 않고, 나는 소녀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를 마주봤다. 같이 싸우자.

“누구 마음대로 남의 메카 쓴다는 거야. 가만있어. 나도 같이 타고, 나도 같이 싸울 테니까.”
“무슨, 그런, 니 맘대로—, 야! 싫어! 나는, 싫어! 너까지 왜! 너까지 그럴 필요 없는데!”
“알아. 너한테 나 같은 거까지 필요 없는 거, 나도 알아. 상관없어. 그냥,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같이 싸울 거야. 넌 신경 안 써도 돼. 네 발목 안 잡아. 나는 그냥 서포터만 하는 거야. 팀플레이 할 때랑 똑같이. 걱정 마. 잘할게.”
“무ㅅ—, 아니, 잠깐, 이 멍청아! 필요 없다는 게, 그런 의미가—!”

필사적으로 무언가 설명하려는 송하나의 말을 듣지 않고, 나는 스위치를 눌러버렸다.

펑!

폭음과 함께 MEKA의 미사일발사관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불꽃은 긴 백연의 꼬리를 끌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잿빛 하늘 높이 솟아오른 그것으로부터, 빛이 폭사했다.

조명탄이었다.

별 없는 하늘에서 별빛처럼 타오르는 마그네슘이 별 대신 어둠을 불밝히기 시작했다.
전장을 비추는 그 인공의 별은 온 세상을 향해 찍어 보이는 핑이었다.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아직, 여기서 싸우고 있다는.

별처럼 빛나는 조명탄의 눈부신 빛을 우러러보며, 송하나는 숨을 삼켰다.
나를 돌아본 녀석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너…, 너, 지금, 뭐, 한…,”

삐————————————!

다음 순간, MEKA의 전자전 장비들이 락온을 감지하고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옴닉의 레이더가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발작하듯 점멸하는 레드얼럿이 캐노피를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AR디스플레이로 공격을 경고하는 메시지가 쏟아졌다. 디스플레이는 적기가 7할, 바다가 3할[4]이었다. 그 디스플레이 너머, 바다를 가르고 밀어닥치는 옴닉의 군단이 있었다.

이제는 나도 도망칠 수 없었다. 돌아갈 잔도는 내가 직접 불태웠다.

이제 같은 MEKA를 탄 소녀를 향해,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보였다. 언제나와 같이.

“자, 송하나. 어서. 오더 해.”
“읏…!”

그 말을 들은 송하나의 눈이 먹구름 낀 하늘처럼 흐려졌다.

입술을 깨문 그 녀석은 질끈 눈을 감고 필사적인 표정이 되어 고민하고 있었지만, 나도, 녀석도 알고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우리는 함께 싸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개를 쳐든 녀석이 키잇! 눈을 치떴다.

“이, 나쁜, 새끼…!”

마치 아까 내가 했던 욕을 되갚아주기라도 하려는 듯한 그 욕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누가 누구보고 제멋대로래. 왜 이럴 때만 니 맘대로 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러는 건지도, 모르고…! —야! 이시백!”

으르렁거린 송하나가 맹수처럼 나를 덮쳤다. 내 무릎에 올라탄 그 무겁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작은 소녀가 내 어깨를 쥐고 나를 사로잡았다. 내게로 얼굴을 들이대고 사납게 노려보는 소녀의 눈은, 그러나 어쩔 바를 모르고 떨고 있었다.

“너 뭐야. 이시백! 너 대체 뭐야! 나 싫다면서! 나 같은 거 상관없다면서 왜 자꾸 상관해! 왜 니가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 니가, 자꾸, 그러니까, 내가—!”

“내가ㅅ…!” 하고. 송하나는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입술을 깨문 그 녀석은 아픈 듯이 자기 가슴을 끌어안고 있었다.
혹시 다치기라도 한 걸까? 놀라서 손을 내미는데, 녀석은 손톱을 세워 내 손을 쳐냈다.

“싫어! 만지지 마!”

앙칼지게 소리치는 송하나의 눈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싫어…, 너, 진짜, 싫어…,” 하고, 괴로운 숨을 몰아쉬면서도 고집스럽게 되뇌는 그 녀석은 마치 정말 내가 미워서 어쩔 수 없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미움받아도 좋았다.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문 채 나를 노려보는 소녀의 젖은 눈을, 나는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힘주어 되풀이했다.

같이 싸우자.

“나랑 네가 같이 조종하면 돼. 단순한 딜은 내가 대신 할 테니까, 송하나, 너는 무빙하고 방어 매트릭스에 집중해. 네가 나보다 훨씬 나으니까, 네가 해.”
“둘이서 같이? 메카 한 대를? 까불지 마. 너 뭐야. 너 무슨 초갈이야? 그게 될 것 같애?”
“돼. 할 수 있어. 팀플레이랑 똑같아. 내가 너한테 맞추면 돼. 맞출 수 있어. 너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너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마. 네 플레이만 해. 나는 서포터야. 자. 송하나.”

D.va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는 스위치를 내렸다.

철컥.

MEKA의 모드가 전환됐다. 오토에서 매뉴얼로. 철컥. 모든 자동운항장치가 꺼졌다. 철컥. 수납되어 있던 조종간들이 나왔다. 철컥. 인간의 두 손만으로는 컨트롤할 수 없어서 오토로 방치했던 것들이 다시 오롯이 인간의 컨트롤에 맡겨졌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둘이라면 할 수 있었다. D.va와 함께라면, 할 수 있었다.

“초갈? 고작? 아니지. 너랑 내가 힘을 합치면 아콘, 집정관이지. 프로리그 사상 최고의 듀오. 공전절후의 팀플레이 전승 카드. 파워 오버웰밍, 압도적인 힘으로. 송하나, 할 수 있지?”
“—하. 하하하.”

기가 찬 듯이 헛웃음을 터뜨리는 그 소녀의 얼굴은, 드리운 앞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너, 진짜 뭐야. 나한테 제멋대로라더니. 야, 이시백, 너 그렇게 자신 있어? 자신이 넘쳐? 니 자신에 주체가 안 돼?[5]”

으르렁거리면서도 송하나는 내 무릎 위에 앉고 있었다. 그 재주 있는 손으로 조종간을 쥐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아름다운 눈이 다시 들려 날카롭게 앞을 향하고 있었다. 눈앞의 옴닉의 군단 앞에서도 겁 없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는 그 녀석은 언제나의 송하나, 언제나의 D.va였다.

“할 수 있냐고? 하! 지금 감히 뭐라는 거야! 이 역대, 체고의, 천재 프로게이머한테!”

나는 웃었다.

게임을 못 하는 프로게이머인 우리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다.
그러나 그 운명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소녀가 나와 함께이다.

긴 칠흑 같은 밤의 계속이다. 질식할 듯한 옴닉의 침략이 모든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6] 이제 자유의 전열에는 우리만이 남았다.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던 나였지만, 이제 이 용감한 소녀와 함께한다.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한다. 자유의 횃불을 높이 든다. 나가자. 자유의 비결은 용기일 뿐이다[7]—,

“뭐래? 또 이상한 거에 꽂혀가지고, 이 중2병.”

그리고 들릴 리 없는 소녀의 대답이 들렸다.

설마 무심코 소리 내서 말한 건가? 어디부터?

놀라 입을 막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쿡. 자유의 비결은 용기? 막 이래. 뭐야, 4.19?”

내 무릎 위에 앉은 소녀가 소리 내 웃고 있었다.
그 소녀의 언제나 같은 웃음이 마치 기적 같아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 젖은 눈을 훔치며 나를 돌아본 송하나는 눈부신 미소로 내게 웃어주었다.

“그래. 그러네. 그럼, 그때 그 사람들처럼—, 우리가 용기가 되자.”



[1]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2016)
[2] 스타크래프트 갤러리, “뭐!? 무결점의 총사령관, 온 프로토스의 희망 송병구가!? 이영호? 잉여호?? 프로토스한테 승률 90%도 못 찍는 씹프막 새끼한테 처발려서 MSL을 광탈했다고?? … 구라치지 마라 스갤 시발들아... 오늘 경기를 한 건 어디서 마막장 서리한이나 탐내고 와우질이나 하는 삼칸의 2군 연습생이었을 거다...”(뭐 시리즈, http://gallog.dcinside.com/kidovelist/248231171090; https://namu.wiki/w/%EB%AD%90%20%EC%8B%9C%EB%A6%AC%EC%A6%88 등 참고)
[3] “가, 짐. 어서.”(블리자드, “스타크래프트 2: 공허의 유산,” 2015)
[4] “船が七分に、海が三分! 船が七分に海が三分だ!(배가 칠 할에, 바다가 삼 할! 배가 칠 할에 바다가 삼 할이다!)”(岡本喜八監督, 「激動の昭和史 沖縄決戦」, 1971, 東宝)
[5] “마! 니 자신잇나! 니 자신 늠치나 니 자신 에 주채가 않 대나?????”(김케장, “30년 전통 원조 할매 레저넌스 바비큐 파티”(http://kimkero.tistory.com/1432))
[6]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사회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방관하랴.”(“4.18 고려대학생 선언문,” 위키문헌(https://ko.wikisource.org/wiki/4%C2%B718_%EA%B3%A0%EB%A0%A4%EB%8C%80%ED%95%99%EC%83%9D_%EC%84%A0%EC%96%B8%EB%AC%B8))
[7]“긴 칠흑 같은 밤의 계속이다. ...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익(一翼)임을 자랑한다. ...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결은 용기일 뿐이다.”(“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의 4.19 선언문,” 우리역사넷(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801&tabId=01&levelId=hm_149_0020))

덧글

  • yail0 2018/05/29 03:30 # 삭제 답글

    패러디 쏘오스도 전부 레퍼로 달린 게 좋네요. 멋져요.
    소재들은 오랜만에 스갤문학 보는 것 같아서 또 좋네요.
    청춘남녀 스토오리는 어떻게 진행될 지 또 기대됩니다.
  • kidovelist 2018/05/29 12:43 #

    나름 오랜 e스포츠 팬으로서 애정을 담아 써 보았는데 알아봐주시는 분이 계셔서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